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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마태복음 해독
    마태복음 4장

     

     

     

    1. 광야에서의 시험 (1~11절)

    4장 1절 말씀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4장 1절 해설

    1) 그 때에
    이 표현은 3장의 마지막 사건, 곧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이 열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던 사건(3장 16~17절) 바로 직후를 가리킨다.

    즉 4장의 시험 사건은 세례 사건과 시간적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며, 이는 성령 강림과 하늘의 인정을 받으신 직후에 곧바로 시험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신앙의 절정 이후에 시련이 뒤따르는 흐름을 보여준다.

     

    2)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이끌리어"로 번역된 헬라어 **ἀνήχθη(아네크데)**는 마가복음 1장 12절의 병행 본문에서는 더 강한 표현인 **ἐκβάλλει(엑발레이, "몰아내다")**로 나타난다. 마태는 이보다 다소 완화된 표현을 사용했지만, 두 표현 모두 예수님의 광야행이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 성령의 주도적인 인도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앞 절인 3장 16절에서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신 사건과 직접 연결되며,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곧바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시험의 자리로 나아가신다는 흐름을 이룬다.

     

    3)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 **πειρασθῆναι(페이라스데나이)**는 단순한 유혹이 아니라 본질을 검증하기 위한 시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시험받던 사건들(신명기 8장 2절)과 연결되는데, 이는 뒤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에 응답하실 때 신명기 본문들을 반복적으로 인용하시는 것(4절, 7절, 10절)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목이다.

     

    4) 광야로 가사
    광야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사십 년간 시험받던 장소(신명기 8장 2절)이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만남과 정결의 장소이기도 하다(호세아 2장 14절).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신 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시험을 다시 재현하시되, 이스라엘과는 달리 온전히 순종하시는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다음 절(2절)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사건이 이스라엘의 사십 년 광야 생활과 상응하는 구조로 이어지는 복선이 된다.

     

     

    4장 2절 말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4장 2절 해설

    1)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사십 일"이라는 기간은 구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적 숫자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사십 주야를 지냈으며(출애굽기 34장 28절), 엘리야는 호렙산까지 사십 주야를 걸어갔다(열왕기상 19장 8절). 앞 절(1절)에서 다루었던 대로 이스라엘 백성 역시 사십 년간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는데(신명기 8장 2절), 이 사십 일은 그 사십 년의 축소판으로 이해되곤 한다. 모세, 엘리야, 그리고 이제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이 사십 일의 패턴은 예수님께서 율법(모세)과 선지자(엘리야)의 전통을 계승하시면서도 그들을 뛰어넘는 인물이심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2) 밤낮으로
    누가복음 4장 2절의 병행 본문에서는 단순히 "사십 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아니하시니"라고만 기록하는데, 마태는 여기에 "밤낮으로(ἡμέρας τεσσεράκοντα καὶ νύκτας τεσσεράκοντα)"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이는 출애굽기 34장 28절에서 모세의 금식을 묘사할 때 사용된 것과 동일한 표현 방식으로, 마태가 의도적으로 모세의 시내산 금식 사건을 떠올리게 하려는 문학적 장치로 이해된다.

     

    3) 주리신지라
    "주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ἐπείνασεν(에페이나센)**은 단순한 배고픔이 아니라 극도의 굶주림, 생리적 한계에 다다른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적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음에도 인간으로서 사십 일 금식의 극한 육체적 고통을 실제로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이 극도의 굶주림의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취약해지는 지점이며, 다음 절(3절)에서 마귀가 정확히 이 지점, 곧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던지는 배경이 된다.

     

     

    4장 3절 말씀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장 3절 해설

    1)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시험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ὁ πειράζων(호 페이라존)**은 1절에서 다룬 "마귀(διάβολος, 디아볼로스)"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나아와서(προσελθὼν)"라는 표현은 마귀가 은밀히 속삭이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접근하여 대면하는 방식으로 시험을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2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이 사십 일 금식으로 극도의 굶주림 상태에 이르신 바로 그 시점에 이루어진 접근이다.

     

    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표현은 3장 17절, 곧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직접 겨냥한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이미 공적으로 선포하신 그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험을 시작한다. 여기서 "만일(εἰ)"이라는 헬라어 조건절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헬라어 문법상 사실로 전제된 조건에 해당한다.

    즉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렇다면 그 능력을 사용해서) ~하라"는 뉘앙스에 가깝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을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전략임을 보여준다.

     

    3)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광야의 돌들, 특히 유대 광야에 흔한 둥글고 빵 모양과 비슷한 돌들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 시험은 2절에서 다룬 예수님의 극심한 굶주림이라는 실제적 필요를 정확히 겨냥한 것이다.

    마귀의 논리는 "네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사용해서 네 자신의 육체적 필요부터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는 능력 자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보다 자기 필요의 충족을 앞세우도록 유도하는 시험이다.

     

    4) 구약과의 연결: 만나 사건과의 병행
    이 시험은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림 가운데 하나님께 불평하며 떡(만나)을 구했던 사건과 병행을 이룬다. 이스라엘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신에 빠졌으나(출애굽기 16장 2~3절), 예수님은 동일한 굶주림의 상황에서 어떻게 응답하시는지가 다음 절(4절)에서 제시된다.

    이는 1절과 2절에서 다루었던,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광야 시험을 새로운 순종의 자리에서 재현하신다는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4장 4절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장 4절 해설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대해 자신의 권위나 논리로 맞서지 않으시고, "기록되었으되(γέγραπται, 게그랍타이)"라는 표현으로 응답을 시작하신다. 이 헬라어 완료 시제는 "과거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유효하게 서 있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시대를 초월한 확고한 권위로 삼고 계심을 보여준다.

    뒤이어 7절과 10절에서도 동일하게 "기록되었으되"라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세 번의 시험 모두를 일관되게 성경 말씀으로 응답하신다는 패턴을 이룬다.

     

    2)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이다. 신명기 8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사십 년의 여정을 회고시키는 본문인데, 그 맥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후 만나를 주심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 하셨다고 말한다.

    즉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처한 굶주림의 상황(2절)을, 옛적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굶주렸던 바로 그 상황과 동일한 신학적 틀 안에서 해석하고 계신 것이다.

     

    3)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구절의 핵심은 육신의 떡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떡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우선한다는 원리를 세우는 데 있다. 3절에서 다룬 대로 마귀는 예수님의 실제적 굶주림을 이용해 "네 능력으로 스스로 해결하라"고 유혹했으나, 예수님은 그 필요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필요를 자기 뜻대로 즉각 해결하기보다 하나님의 뜻과 때를 신뢰하는 것이 우선임을 답하신다.

     

    4) 이스라엘의 실패와 예수님의 순종의 대조
    이 응답은 1절과 2절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온 주제, 곧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광야 시험을 재현하시되 온전한 순종으로 통과하신다는 흐름의 첫 번째 결실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굶주림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신에 빠졌지만(출애굽기 16장, 신명기 8장 3절의 배경), 예수님은 동일한 굶주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응답하신다.

     

     

    4장 5절 말씀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4장 5절 해설

    1)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거룩한 성(τὴν ἁγίαν πόλιν, 텐 하기안 폴린)"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명칭은 구약에서도 예루살렘을 지칭할 때 사용되던 표현으로(느헤미야 11장 1절, 이사야 48장 2절),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도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귀가 예수님을 이곳으로 "데려갔다"는 것은, 앞선 시험(3~4절)이 광야라는 척박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이번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전이 있는 가장 거룩한 장소를 무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시험의 성격 자체가 달라짐을 보여준다.

     

    2)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성전 꼭대기(τὸ πτερύγιον τοῦ ἱεροῦ, 토 프테뤼기온 투 히에루)"가 정확히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성전 남동쪽 모서리, 곧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왕실주랑(Royal Portico) 꼭대기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지점은 골짜기 바닥까지의 높이가 상당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고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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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장소 이동의 의미
    1절에서 다룬 대로 첫 번째 시험이 광야, 곧 인적이 드문 곳에서 예수님의 개인적 필요(굶주림)를 겨냥한 은밀한 시험이었다면, 이번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공적 장소로 무대가 옮겨진다.

    이는 다음 절(6절)에서 마귀가 요구하는 시험의 성격, 곧 대중 앞에서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극적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유혹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배경이 된다.

     

     

    4장 6절 말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4장 6절 해설

    1)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3절에서 다룬 것과 동일한 표현이 반복된다. 헬라어 문법상 이 "만일(εἰ)"도 동일하게 사실로 전제된 조건문(1종 조건문)이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렇다면) 뛰어내리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즉 마귀는 두 번째 시험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2) 뛰어내리라
    5절에서 다룬 대로 이곳은 상당한 높이의 성전 꼭대기이다. 마귀는 예수님께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을 보호하시는지를 극적으로 시험해 보라고 요구한다. 이는 4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로 첫 시험을 물리치신 것에 대응하여, 이번에는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신뢰를 극적인 방식으로 입증해 보라"는 논리로 전환된 시험이다.

     

    3) 기록되었으되 - 마귀의 성경 인용
    주목할 점은 마귀가 이번에는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 곧 "기록되었으되(γέγραπται)"라는 표현으로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이다. 4절에서 예수님이 신명기 말씀으로 응답하신 것을 보고, 마귀는 이제 성경 말씀 자체를 시험의 도구로 역이용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는 사탄이 단순히 세속적 유혹만이 아니라 성경을 왜곡하여 인용하는 방식으로도 시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4) 인용된 말씀의 출처: 시편 91편 11~12절
    마귀가 인용하는 말씀은 시편 91편 11~12절이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와 요새로 삼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의 사자(천사)들을 명하여 그의 모든 길에서 그를 지키게 하시고, 그들이 손으로 그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5) 마귀의 왜곡: 문맥을 벗어난 인용
    시편 91편의 원래 맥락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호의 약속이다. 즉 이 약속은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 가운데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삶 속에서 임하는 보호를 노래한 것이다. 마귀는 이 본문을 원래의 맥락(신뢰의 삶에 따르는 보호)에서 떼어내어, 정반대의 목적(하나님을 시험하는 무모한 행위의 정당화)에 사용하도록 왜곡한 것이다.

     

     

    4장 7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장 7절 해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또(πάλιν, 팔린)"라는 표현이 주목할 만하다. 예수님은 마귀가 인용한 시편 91편 말씀 자체를 부정하거나 반박하지 않으신다. 대신 "또 기록되었으되"라는 표현으로 또 다른 성경 본문을 제시하신다. 이는 성경의 한 구절을 문맥에서 떼어내어 왜곡하여 사용할 때, 그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그 구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다른 본문과 함께 균형 있게 이해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의 인용이다. 신명기 6장 16절은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기록하는데, 이는 4절에서 다룬 신명기 8장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배경으로 한다.

     

    3) "맛사"에서의 사건과의 연결
    "맛사"는 출애굽기 17장 1~7절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자 모세와 다투며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출애굽기 17장 7절)를 시험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신뢰로 받아들이기보다, 눈에 보이는 즉각적 증거로 확인받으려 했던 불신앙의 태도였다. 신명기 6장 16절은 바로 이 사건을 상기시키며 다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4) 6절 시편 91편과의 관계 정리
    6절에서 다룬 대로 마귀는 시편 91편의 보호 약속을 인용하며 예수님께 뛰어내리라 유혹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속에 자연스럽게 임하는 보호이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 뒤 하나님이 그것을 증명해 보이시길 요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아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신명기 6장 16절은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겨냥한다. 즉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의 보호를 요구하는 것은 신뢰의 표현이 아니라, 맛사에서 이스라엘이 그러했듯 하나님께 증거를 강요하는 불신앙의 행위라는 것이다.

     

    5) 이스라엘의 실패와 예수님의 순종의 재확인
    이는 앞서 4절에서 다룬 주제, 곧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광야 시험을 재현하시되 온전한 순종으로 통과하신다는 흐름의 두 번째 결실이다. 이스라엘은 맛사에서 하나님을 시험함으로 실패했으나, 예수님은 동일한 유혹 앞에서 그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고 신명기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지키신다.

     

     

    4장 8절 말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장 8절 해설

    1)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또(πάλιν, 팔린)"라는 표현은 이것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험임을 알려준다. 5절에서 다룬 대로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갔는데(παραλαμβάνει)", 여기서도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어 마귀가 시험의 장소를 계속해서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이끌어가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2)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이 산이 지리적으로 어느 산일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특정하지 않는다. 다만 주목할 점은 실제 지구상의 어떤 산에서도 "천하 만국"을 물리적으로 눈에 다 담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이 장면을 단순한 물리적 조망이 아니라, 마귀가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님께 세상 왕국들의 영광을 환상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앞서 5절에서 성전 꼭대기로의 이동 방식에 대해 다루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본문이 그 과정의 메커니즘을 명시하지 않는 지점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영광(δόξα, 독사)"이라는 단어는 각 나라들이 지닌 부, 권세, 화려함, 통치의 위엄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이는 다음 절(9절)에서 마귀가 구체적으로 밝히는 시험의 내용, 곧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제안의 배경이 된다.

     

    4) 앞선 두 시험과의 대조
    1~2절의 첫 시험이 예수님의 개인적 필요(굶주림)를 겨냥했고, 5~6절의 두 번째 시험이 하나님과의 관계(신뢰와 증거 요구)를 겨냥했다면, 이 세 번째 시험은 통치권과 세상 영광을 직접 겨냥한다.

    특히 이번 시험에서는 앞선 두 시험과 달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조건절이나 성경 인용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마귀가 이제 정체성에 대한 교묘한 유혹을 넘어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유혹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준다.

     

     

    4장 9절 말씀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4장 9절 해설

    1)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여기서도 "만일(εἰ)"이라는 조건절이 사용되지만, 앞선 두 시험(3절, 6절)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겨냥한 조건이 아니라, **행위 자체(경배)**를 조건으로 내건다. "엎드려 경배하면(προσκυνήσῃς, 프로스퀴네세스)"은 단순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2) 마귀의 노골적인 정체 노출
    8절에서 다룬 대로 앞선 두 시험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의 정체성이나 성경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접근했지만, 이 세 번째 시험에서는 더 이상 그런 위장이 없다. 마귀는 스스로 경배의 대상이 되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자신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는 이사야 14장 12~14절에서 묘사되는 "가장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는 교만의 본질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다.

     

    3)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8절에서 보여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가리킨다. 여기서 마귀의 제안이 지닌 근본적 기만이 드러나는데, 마귀가 마치 이 만국의 영광이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이 마음대로 나누어 줄 권한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편 24편 1절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이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선언하며, 만물의 참된 소유주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마귀의 제안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내놓는 거짓 제안인 것이다.

     

    4) 지름길의 유혹
    이 시험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받으실 만국에 대한 통치권(마태복음 28장 18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을, 고난과 순종의 과정 없이 즉시, 지름길로 얻으라는 유혹이다. 즉 목적지(만국에 대한 통치)는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할 수 있으나, 그 경로(마귀에게 경배함으로 얻는 것)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4장 10절 말씀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장 10절 해설

    1)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앞선 두 번의 응답(4절, 7절)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때는 곧바로 "기록되었으되"로 시작하며 말씀을 인용하셨지만, 여기서는 그에 앞서 "사탄아 물러가라(ὕπαγε, Σατανᾶ)"는 강한 명령이 먼저 주어진다. "물러가라(ὕπαγε)"는 헬라어 현재 명령형으로 즉각적이고 단호한 축출의 명령이다. 9절에서 다룬 대로 마귀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내세우는 최고조의 유혹을 시도하자, 예수님도 이에 상응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권위 있는 방식으로 대응하신 것이다.

     

    2) 사탄이라는 호칭의 등장
    1절 이후 지금까지 본문은 이 존재를 "마귀(διάβολος)" 또는 "시험하는 자(ὁ πειράζων)"로만 지칭해 왔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탄(Σατανᾶ)"이라는 히브리어 기원의 명칭이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존재를 이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지금까지 은밀하고 교묘하게 접근해 온 그 정체를 정확히 폭로하며 대적하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3)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의 인용이다(70인역 계열 본문과 유사). 신명기 6장은 앞서 7절에서 다룬 6장 16절과 같은 장에 속하는데, 이는 세 번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 중 두 번(7절, 10절)이 모두 신명기 6장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신명기 6장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쉐마(신명기 6장 4~5절)를 중심으로 한 장이다.

     

    4) "다만(μόνῳ)"이라는 배타성
    헬라어 원문에서 "다만 그를 섬기라"의 "다만(μόνῳ, 모노)"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하다. 이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대상에게도 경배와 섬김이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배타적 충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9절에서 마귀가 요구한 것이 바로 이 배타성을 깨뜨리는 것, 곧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응답은 그 유혹의 핵심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반박한다.

     

    5) 세 시험 전체의 완결
    이로써 세 가지 시험(3~4절, 5~7절, 8~10절)이 모두 신명기 본문(각각 8장 3절, 6장 16절, 6장 13절)으로 물리쳐졌다. 이 세 본문은 공교롭게도 모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었던 실패의 경험들을 배경으로 한 말씀들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바로 그 지점들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것과 정반대로 온전한 순종을 보이심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신다.

     

     

    4장 11절 말씀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4장 11절 해설

    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10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히 명령하신 직후, 마귀는 곧바로 물러간다. "떠나고(ἀφίησιν, 아피에신)"는 헬라어 현재 시제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앞에서 마귀가 지체 없이 즉각적으로 굴복하여 물러났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4장 13절은 여기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는 표현을 덧붙이는데, 이는 이 시험의 종결이 마귀와의 영적 대결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다른 형태로 시험이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실제로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시는 장면이나, 마태복음 26장 겟세마네 사건 등에서 유사한 영적 긴장이 다시 나타난다).

     

    2) 천사들이 나아와서
    1~2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은 사십 일 금식으로 극도의 굶주림 상태에 계셨고, 이제 세 번의 격렬한 영적 시험까지 온전히 통과하신 직후이다. 이 시점에 천사들이 "나아와서(προσῆλθον)" 그분을 섬긴다는 것은, 시험의 광야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의 순종에 응답하시며 회복과 공급의 손길을 베푸시는 장면으로 이해된다.

    흥미롭게도 3절에서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προσελθὼν)"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한 어근이 여기서도 사용되는데, 이는 마귀의 "나아옴"과 천사들의 "나아옴"이 의도적으로 대조를 이루도록 배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수종드니라
    "수종들다(διηκόνουν, 디에코눈)"는 미완료 시제로, 한 번의 일회적 섬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중들었음을 나타낸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섬겼는지 본문이 명시하지 않지만, 문맥상 사십 일 금식 후 필요했던 음식 공급 등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는 섬김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는 열왕기상 19장 5~8절에서 엘리야가 광야에서 지쳐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떡과 물을 제공했던 사건과 병행을 이루는데, 앞서 2절에서 다룬 대로 엘리야의 사십 주야 금식이 이미 예수님의 사십 일과 병행되었던 만큼, 이 장면에서도 그 병행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4) 단락 전체의 결론
    이로써 1절부터 시작된 광야 시험 단락(1~11절)이 마무리된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들어가시고(1절), 극한의 굶주림 가운데(2절) 세 가지 시험을 온전한 순종으로 통과하신(3~10절)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공급과 천사의 섬김을 받으시며 다음 단계인 갈릴리 사역(12절 이하)으로 나아가실 준비를 마치신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자리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이 단락 전체를 통해 확증된 것이다

     

    2. 갈릴리 사역의 시작 (12~17절)

     

    4장 12절 말씀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4정 12절 해설

    1)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잡혔음(παρεδόθη, 파레도데)"은 헬라어 수동태로 문자적으로는 "넘겨졌다"는 뜻이다.

    이는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에 의해 투옥된 사건을 가리키는데, 그 구체적인 경위는 마태복음 14장 3~4절에서 다시 다루어진다(요한이 헤롯의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의 결혼을 책망했다가 옥에 갇힌 사건).

    여기서는 그 사건의 결과만 간략히 언급되고 상세한 전말은 훨씬 뒤에 가서야 서술되는데, 이는 마태가 시간순 나열보다 신학적 흐름을 중심으로 본문을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 사역 계승의 의미
    3장 1~12절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며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이제 그 요한이 옥에 갇힘으로써 그의 공적 사역은 사실상 끝나고,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전환점이 마련된다.

    실제로 17절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첫 메시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요한의 메시지(3장 2절)와 문자 그대로 동일하다. 이는 예수님이 요한이 예비한 사역을 이어받아 계승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3)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물러가다(ἀνεχώρησεν, 아네코레센)"라는 단어가 주목할 만하다. 이 동사는 앞서 2장 12절, 14절, 22절에서 박사들과 요셉이 헤롯(및 아켈라오)의 위협을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나갈" 때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던 것과 동일한 단어이다.

    즉 여기서도 예수님의 이동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요한을 잡아 가둔 정치권력(헤롯 안디바)의 위협을 피하시는 성격을 함께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4장 13절 말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4장 13절 해설

    1) 나사렛을 떠나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나신 고향 마을이다(마태복음 2장 23절). 그런데 이곳을 "떠나셨다"는 것은 단순한 거처 이동을 넘어, 앞서 12절에서 다룬 대로 세례 요한이 잡힌 이후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며 고향을 벗어나 새로운 사역의 근거지로 옮겨가시는 전환점을 나타낸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후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시는 사건을 겪으시는데(누가복음 4장 16~30절), 이러한 배경도 사역의 중심지가 나사렛에서 옮겨가는 흐름과 맞물려 이해될 수 있다.

     

    2)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두 지파로, 여호수아 19장 10~16절과 32~39절에 그 기업의 경계가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지파의 영토는 갈릴리 호수 서편과 북편 일대를 포함하는데,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앗수르의 침공(주전 8세기, 열왕기하 15장 29절)으로 가장 먼저 이방 민족의 지배와 혼입을 겪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적 배경은 다음 절(14~16절)에서 인용되는 이사야 9장 1~2절 말씀, 곧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는 표현과 직결된다.

     

    3)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 연안에 위치한 어촌 마을로, 당시 로마의 주요 도로(해변길, Via Maris)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예수님께서 이곳을 사역의 근거지로 삼으신 것은 전략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이 길을 통해 갈릴리와 다메섹, 지중해 연안 도시들까지 오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자연스럽게 전파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가서 사시니(κατῴκησεν)"**라는 표현은 일시적 방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 정착하여 거하셨음을 나타내며, 이후 복음서 전반에서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본거지"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과 일치한다(마태복음 8장 5절, 9장 1절 등에서 가버나움은 "자기 동네"로 언급된다).

     

    가버나움 위치

     

     

     

    4장 14절 말씀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장 14절 해설

    1) 이는 ~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 표현은 헬라어 **ἵνα πληρωθῇ(히나 플레로데)**로, 마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성취 인용 공식이다.  다만 2장 17절에서 이미 짚었던 대로, 이 목적절 표현("이루려 하심이라")은 모든 인용에 동일하게 붙는 것이 아니라, 마태가 각 사건의 성격에 따라 신중하게 취사선택하는 표현이다.

    2장 17절(무죄한 아기들의 학살)에서는 이 목적절이 생략되고 단순히 "말씀하신 바"라고만 서술되었던 반면, 여기 14절에서는 다시 "이루려 하심이라"는 명확한 목적 표현이 사용된다. 이는 갈릴리 정착이라는 사건이 학살 사건과 달리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의도하신 성취임을 마태가 분명히 밝히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2)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13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가버나움에 정착하신 사건이, 이제 구약 이사야서의 예언과 연결된다. 다음 절(15~16절)에서 구체적으로 인용되는 본문은 이사야 9장 1~2절이다.

     

    3) 이사야서 원문맥의 배경
    이사야 9장 1절은 앞선 8장 말미의 심판 선언에 이어지는 본문으로, 주전 8세기 앗수르 디글랏빌레셀 3세의 침공(열왕기하 15장 29절)으로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이 가장 먼저, 가장 혹독하게 짓밟혔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사야는 그 고통과 어둠의 땅에 장차 큰 빛이 비칠 것이라는 소망의 예언을 선포하였다.

     

     

    4장 15절 말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장 15절 해설

    1)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13절에서 다룬 대로 이 두 지파는 갈릴리 호수 서편과 북편 일대를 기업으로 받았다(여호수아 19장 10~16절, 32~39절).

    이 구절은 이사야 9장 1절의 인용으로, 원문맥에서 이 두 지파의 땅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14절에서 다룬 대로 앗수르 침공(주전 8세기, 열왕기하 15장 29절) 때 이스라엘 영토 중 가장 먼저 짓밟히고 이방 세력에게 점령당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가장 먼저 어둠을 경험했던 그 땅에 가장 먼저 빛이 임할 것이라는 반전의 예언을 선포한 것이다.

     

    2) 요단 강 저편 해변 길
    "해변 길(ὁδὸν θαλάσσης, 호돈 달랏세스)"은 갈릴리 호수 연안을 따라 나 있던 고대의 주요 국제 교역로, 곧 "비아 마리스(Via Maris)"를 가리킨다.

    13절에서 다룬 대로 가버나움이 바로 이 길목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 길은 애굽에서부터 팔레스타인 해안을 거쳐 다메섹과 메소포타미아까지 이어지는 고대 근동의 대동맥과 같은 교통로였다.

     

    3) 이방의 갈릴리여
    "이방의 갈릴리(Γαλιλαία τῶν ἐθνῶν, 갈릴라이아 톤 에드논)"라는 표현은 갈릴리 지역이 앗수르 침공 이후 오랫동안 이방 민족들이 이주하여 혼합된 인구 구성을 이루었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유대 지역 중심의 관점에서 볼 때 갈릴리는 순수한 혈통과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이방과 뒤섞인 변방으로 여겨지곤 했다. 실제로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장면도, 갈릴리 지역에 대한 이러한 낮은 인식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지리·역사적 요약이 갖는 의미
    이 구절은 지역의 이름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서 다룬 대로 고통(앗수르의 압제), 교류(국제 교역로), **혼합(이방과의 혼재)**이라는 세 가지 역사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마태가 이 본문을 인용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종교적으로 정결하고 중심적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이런 변방적이고 소외된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4장 16절 말씀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4장 16절 해설

    1)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흑암(σκότει, 스코테이)"과 "앉은(καθήμενος, 카데메노스)"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것이 인상적이다. "앉다"는 단순히 어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랫동안 그 어둠 속에 머물러 정착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앞서 14~15절에서 다룬 대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앗수르의 침공(주전 8세기) 이후 오랜 세월 이방의 압제와 영적 소외를 겪어온 지역이었는데, 이 표현은 그 지속적이고 고착된 어둠의 상태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2)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사망의 그늘(σκιᾷ θανάτου, 스키아 다나투)"이라는 표현은 구약 시편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관용구이다. 시편 23편 4절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욥기 10장 21~22절에서 죽음과 흑암을 동일시하는 표현과 맥을 같이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어둠을 넘어, 소망 없는 절망과 죽음의 실존적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3) 빛이 비치었도다
    "비치다(ἀνέτειλεν, 아네테일렌)"는 본래 해가 떠오르는 것을 묘사할 때 쓰이는 동사이다. 즉 이 표현은 어둠을 뚫고 새벽이 밝아오듯, 메시아의 임재가 그 땅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임했음을 그려낸다.

    이는 앞서 13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지역(가버나움)에 정착하여 사역을 시작하신 사건이, 바로 이 예언된 빛의 임함으로 성취되었다는 마태의 해석이다.

     

    4) 이사야 원문맥과의 연결
    14절에서 다룬 대로 이사야 9장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가장 먼저 짓밟혔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오히려 가장 먼저 회복의 빛이 비칠 것이라는 반전의 예언이었다.

    실제로 이사야 9장 6~7절은 곧이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는 메시아 예언으로 이어진다.

    즉 마태가 인용한 9장 1~2절은 그 뒤에 이어지는 메시아 탄생 예언의 서곡과 같은 본문이며, 마태는 이 전체 흐름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갈릴리 정착을 그 예언의 성취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4장 17절 말씀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4장 17절 해설

    1)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 때부터(Ἀπὸ τότε, 아포 토테)"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알리는 문구로, 이후 16장 21절("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어 예수님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지점을 표시한다.

    여기서는 앞서 12~16절에서 다룬 갈릴리 정착과 이사야 예언의 성취를 배경으로, 이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비로소(ἤρξατο, 에륵사토, "시작하다")"라는 단어 역시 지금까지의 사건들(광야 시험, 갈릴리 이주)이 이 공적 선포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2) 전파하여(κηρύσσειν, 케륏세인)
    이 동사는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왕의 사자가 공적 포고령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권위 있는 공적 선언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는 3장 1절에서 세례 요한이 "전파하여(κηρύσσων)" 회개를 선포했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단어이며, 다음에서 다룰 대로 그 메시지의 내용까지 동일하다.

     

    3)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는 3장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메시지와 문자 그대로 동일한 문구이다. "회개하라(μετανοεῖτε, 메타노에이테)"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체를 돌이키는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며,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마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주제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을 가리킨다.

    가까이 왔느니라(ἤγγικεν, 엥기켄)"는 완료 시제로, 이미 임박하여 현재적 실재로 다가와 있음을 나타낸다.

     

    4) 요한의 메시지 계승과 그 의미
    12절에서 다룬 대로 요한이 옥에 갇힘으로써 그의 공적 사역이 끝난 시점에, 예수님이 동일한 메시지로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계승과 심화를 의미한다.

    요한은 오실 이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였고(3장 3절), 이제 그 예비된 길 위에서 예수님이 친히 그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같은 메시지이지만 그것을 선포하는 주체가 달라졌다는 점에서, 이는 예비자의 외침에서 그 실체이신 왕 자신의 선포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3. 첫 제자들을 부르심 (18~22절)

    4장 18절 말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4장 18절 해설

    1)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17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공적 선포를 시작하신 직후, 곧바로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15절에서 다룬 대로 갈릴리 호수 연안은 비아 마리스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어업이 성행하던 지역이었다. "다니시다가(περιπατῶν, 페리파톤)"라는 현재분사는 예수님께서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서두르신 것이 아니라, 해변을 거니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제자들과 마주치신 상황을 보여준다.

     

    2)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시몬(Σίμων)"은 히브리어 이름 "시므온(שִׁמְעוֹן)"의 헬라어 음역으로, 흔한 유대인 이름이었다. "베드로(Πέτρος, 페트로스)"는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뜻을 지닌 별명인데, 이는 예수님께서 나중에 직접 붙여주신 이름이다(마태복음 16장 18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서 이미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라고 소개되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하는 시점에서 이 인물이 이미 초대교회 전체에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리 그 이름을 붙여 소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안드레는 요한복음 1장 40~42절에 따르면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인물로, 자신의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바다(θάλασσα, 달랏사)"라고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관용적 표현에서는 큰 호수도 종종 "바다"로 불렸다(예: 민수기 34장 11절의 "긴네렛 바다"). 그물을 던지는 행위는 이 형제들이 실제로 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임을 보여준다.

     

    4) 그들은 어부라
    이 짧은 설명은 이들의 사회적 신분과 삶의 배경을 압축적으로 전해준다. 어부는 당시 사회에서 특별히 학식 있는 계층이 아니라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평범한 서민층에 속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처음 부르신 제자들이 종교 엘리트나 학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생업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은 다음 절(19~2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부르실 때, 그들의 기존 직업(고기잡이)과 새로운 소명(사람을 낚음) 사이의 절묘한 연결점을 이루는 배경이 된다.

     

     

    4장 19절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4장 19절 해설

    1) 나를 따라오라
    "따라오라(δεῦτε ὀπίσω μου, 듀테 오피소 무)"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권위 있는 부르심의 명령이다. 당시 랍비와 제자의 관계에서는 통상 제자가 스스로 원하는 랍비를 선택하여 그 문하에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여기서는 그 관행과 반대로 예수님께서 먼저 주도적으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다. 이는 예수님이 일반적인 랍비들과는 다른 독특한 권위를 지니신 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 내가 너희를
    18절에서 다룬 대로 이들은 평범한 어부였다. "내가(ἐγώ)"라는 강조형 인칭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이들의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이 스스로의 결심이나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부르심과 능력에 근거한 것임을 부각시킨다.

     

    3)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 할리에이스 안드로폰)"라는 표현은 이들의 기존 직업(어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삶의 기술과 경험을 완전히 새로운 목적, 곧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사명으로 전환시키는 표현이다.

    이는 18절에서 다룬 그들의 생업(그물 던지는 것)과 정확히 대응되는 은유로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소명으로 승화시키신 것이다.

     

    4) 구약적 배경: 예레미야 16장 16절
    "사람을 낚는다"는 은유는 구약에서도 발견되는데, 예레미야 16장 16절은 하나님이 "많은 어부를 불러 그들을 낚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이는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다시 모으시는 심판과 회복의 문맥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다만 예레미야의 문맥은 심판의 도구로서의 "낚음"에 가까운 반면,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은유는 사람들을 생명과 천국(17절)으로 이끄는 구원의 사역으로 그 의미가 새롭게 채워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4장 20절 말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4장 20절 해설

    1) 그들이 곧
    "곧(εὐθέως, 유데오스)"이라는 부사가 핵심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즉각적인 반응을 강조하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19절에서 다룬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 형제들이 망설이거나 계산하지 않고 즉시 응답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뒤이어 21~22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패턴이다.

     

    2) 그물을 버려 두고
    "버려 두고(ἀφέντες, 아펜테스)"는 단순히 잠시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하고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18절에서 다룬 대로 그물은 이들의 생계 수단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곧 기존의 직업, 안정된 생활 기반, 익숙한 정체성 전체를 내려놓는 결단을 상징한다.

     

    3) 예수를 따르니라
    "따르다(ἠκολούθησαν, 에콜루데산)"라는 단어는 단순히 뒤를 쫓아가는 물리적 동작을 넘어,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로 자리 잡는다(예: 8장 22절, 9장 9절 등). 이는 19절에서 다룬 예수님의 부르심("나를 따라오라")에 정확히 상응하는 응답으로, 말씀과 순종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장면을 이룬다.

     

    4) 부르심과 응답의 극적인 대조
    이 짧은 한 구절 안에 담긴 전환은 매우 극적이다. 조금 전까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평범한 어부들이(18절), 예수님의 한 마디 부르심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버린다. 이는 17절에서 다룬 "회개하라"는 메시지, 곧 삶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된다.

     

     

    4장 21절 말씀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4장 21절 해설

    1) 거기서 더 가시다가
    18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며 첫 두 형제(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직후, 계속해서 해변을 따라 이동하시는 장면이다. 이는 같은 날, 같은 해변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보여준다.

     

    2)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세베대(Ζεβεδαῖος, 제베다이오스)"는 히브리어 이름 "지브디(זִבְדִּי)"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정된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이후 복음서 전체에서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님의 핵심 측근 제자로 반복해서 등장한다(마태복음 17장 1절 변화산 사건, 26장 37절 겟세마네 사건 등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이 따로 동행한다).

    마가복음 3장 17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두 형제에게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이셨는데, 이는 이들의 격정적인 성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누가복음 9장 54절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리자고 제안하는 장면 참조).

     

    3)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18절에서 시몬과 안드레가 "그물 던지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과 달리, 여기서는 "그물 깁는(καταρτίζοντας, 카타르티존타스)"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단어는 찢어지거나 헤어진 그물을 수선하여 온전하게 만드는 작업을 가리키며, 어업이 단순히 그물을 던지는 것만이 아니라 도구를 정비하고 유지하는 노동까지 포함하는 생업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가족 단위로 운영되던 어업이었음을 나타내며, 마가복음 1장 20절은 이들에게 "삯꾼들"이 있었다고 덧붙여 상당한 규모를 갖춘 어업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4) 부르시니
    19절에서 시몬과 안드레에게 주어졌던 구체적인 부르심의 말씀("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이 여기서는 반복되지 않고 "부르시니(ἐκάλεσεν, 에칼레센)"라는 동사로 압축되어 서술된다. 이는 앞서 언급된 부르심의 내용과 방식이 동일하게 반복되었음을 전제하는 생략법으로 이해된다

     

     

    4장 22절 말씀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4장 22절 해설

    1) 그들이 곧

    20절에서 다룬 시몬과 안드레의 반응과 동일하게 "곧(εὐθέως, 유데오스)"이라는 부사가 다시 사용된다. 두 쌍의 형제 모두에게서 동일한 즉각성이 강조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 지체 없는 순종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마태의 서술 패턴이다.

     

    2)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20절에서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었지만, 여기서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둔다는 점에서 그 포기의 강도가 한층 더 심화된다. 21절에서 다룬 대로 이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가족 단위의 상당한 규모를 갖춘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배(생산 수단)뿐 아니라 아버지(가장 근본적인 가족 관계와 부양의 책임)까지 내려놓았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 포기를 넘어서는 결단이다.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에 대한 순종과 부양의 의무는 매우 중대한 것이었기에(출애굽기 20장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그만큼 강력한 우선순위의 전환을 보여준다.

     

    3) 예수를 따르니라

    20절에서 다룬 대로 이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제자 됨을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두 쌍의 형제 모두 동일하게 "따르니라"는 결론에 이르는데, 이는 18절부터 이어져 온 첫 제자들 부르심 단락(18~22절) 전체를 통일성 있게 마무리하는 표현이다.

     

    4) 두 형제 쌍의 병행 구조

    18~20절(시몬과 안드레)과 21~22절(야고보와 요한)은 의도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이룬다. 두 장면 모두 "보시고 → 부르시니(혹은 부르심의 말씀) → 곧 → 버려두고 → 따르니라"는 동일한 서술 패턴을 따른다.

    이러한 반복적 병행 구조는 이 부르심이 우연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일관되고 의도적인 소명의 패턴임을 강조하는 문학적 장치로 이해된다.

     

     

    4. 갈릴리 사역의 요약 (23~25절)

     

    4장 23절 말씀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4장 23절 해설

    1)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17~22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은 공적 선포를 시작하시고(17절) 첫 제자들을 부르셨다(18~22절). 이제 23절부터는 그 사역의 범위와 성격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단락이 시작된다. "두루 다니사(περιῆγεν, 페리에겐)"라는 미완료 시제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순회 사역이었음을 나타낸다.

     

    2)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회당(συναγωγαῖς, 쉬나고가이스)"은 성전과 달리 각 지역 마을마다 세워진 예배와 교육의 중심지로, 바벨론 포로기 이후 발전한 유대인 공동체의 핵심 기관이었다. "그들의(αὐτῶν)"라는 표현이 흥미로운데, 이는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하는 시점(대략 주후 70~90년대)에 이미 유대교 회당과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생겨났음을 반영하는 표현으로 이해되곤 한다.

    "가르치시며(διδάσκων)"는 회당의 통상적 기능, 곧 랍비들이 성경을 강론하는 방식과 연결되는 활동이다.

     

    3)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17절에서 다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선포가 여기서 "천국 복음(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ῆς βασιλείας)"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복음(εὐαγγέλιον)"은 본래 왕의 즉위나 전쟁의 승리와 같은 좋은 소식을 공적으로 선포할 때 사용되던 헬라어 단어인데,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궁극적인 좋은 소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4)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모든 병(πᾶσαν νόσον)"과 "모든 약한 것(πᾶσαν μαλακίαν)"이라는 표현에서 "모든(πᾶσαν)"이 반복되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지닌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이 치유 사역은 다음 절(24~25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확대되어 서술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단지 말씀 선포(가르침, 전파)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몸의 회복까지 포함하는 온전한 사역이었음을 보여준다.

     

    5) 사역의 세 축: 가르침, 전파, 치유

    이 구절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전체를 가르침(διδάσκων), 전파(κηρύσσων), 치유(θεραπεύων) 라는 세 가지 활동으로 요약하는데, 이 세 단어의 조합은 이후 9장 35절에서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타난다("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는 마태복음이 이 세 가지 활동을 예수님 사역의 핵심적이고 일관된 패턴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장 24절 말씀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4장 24절 해설

    1)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23절에서 다룬 예수님의 가르침, 전파, 치유 사역의 결과로 그 명성이 퍼져나가는 장면이다. "수리아(Συρίαν, 쉬리안)"는 갈릴리 북쪽에 인접한 로마의 속주로, 당시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지역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소문이 유대 지역을 넘어 이방 땅인 수리아까지 퍼졌다는 것은, 15절에서 다룬 "이방의 갈릴리"라는 배경 위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이미 이방 세계로까지 그 영향력을 뻗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2)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를 데려오니
    23절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이라는 포괄적 표현이 쓰였다면, 여기서는 그 병들이 구체적으로 열거되며 더욱 생생하게 묘사된다.

    "데려오니(προσήνεγκαν)"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앞서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사람들을 찾아 순회하시던(23절, "두루 다니사") 모습과 대비되어, 이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방향으로 사역의 흐름이 전환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3)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
    이 목록은 육체적 질병(고통 당하는 자, 중풍병자)과 영적 문제(귀신 들린 자)를 함께 포함하는데, 이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질병과 영적 세력의 문제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이해되었음을 반영한다.

    "귀신 들린 자(δαιμονιζομένους)"에 대한 언급은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영적 대결의 차원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예고하는데, 이는 1~11절에서 다룬 광야에서의 마귀와의 대결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이후 사역 전반에서 계속 이어지는 주제임을 보여준다.

    "간질하는 자(σεληνιαζομένους)"는 문자적으로 "달의 영향을 받는 자"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 당시 사람들이 이 증상을 달의 주기와 연관 지어 이해했던 통념을 반영한다.

     

    4) 그들을 고치시더라"고치시더라(ἐθεράπευσεν)"는 부정과거 시제로, 이 모든 다양한 병자들이 예외 없이 치유받았음을 나타낸다. 이는 23절에서 다룬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이라는 포괄적 선언이 실제 구체적 사례를 통해 확증되는 장면이다.

     

     

    4장 25절 말씀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4장 25절 해설

    1)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4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의 소문이 수리아까지 퍼지고 각종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결과, 이제 각지에서 몰려온 "수많은 무리(ὄχλοι πολλοί)"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여기서 "따르니라(ἠκολούθησαν)"는 20절과 22절에서 다룬 제자들의 "따름"과 동일한 단어이지만, 그 성격은 다르다. 제자들의 따름이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헌신(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림)이었다면, 여기서 무리의 따름은 아직 그 정도의 헌신에 이르지 않은, 소문과 치유를 좇는 대중적 관심의 단계로 이해된다.

     

    2) 다섯 지역의 지리적 범위

    • 갈릴리: 13~16절에서 다룬 예수님의 사역 근거지 지역이다.
    • 데가볼리(Δεκάπολις, 데카폴리스): 문자적으로 "열 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요단 강 동편에 위치한 헬라화된 열 개 도시 연맹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상당수 이방인이 거주하던 곳으로, 예수님의 소문이 이방 지역에까지 퍼졌음을 보여준다.
    • 예루살렘: 유대 신앙의 중심지로, 12절에서 다룬 대로 예수님이 물러가셨던 정치·종교 권력의 중심지에서도 무리가 찾아왔음을 나타낸다.
    • 유대: 예루살렘을 포함한 남부 지역 전체를 가리킨다.
    • 요단 강 건너편(페레아): 요단 강 동편 지역으로, 세례 요한이 사역했던 곳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이다(3장 1절 배경).

    3) 지리적 범위가 지닌 신학적 의미
    이 다섯 지역은 갈릴리(북) - 데가볼리(동, 이방) - 예루살렘/유대(남) - 요단 강 건너편(동남)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땅 전체와 그 접경 이방 지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범위이다. 이는 14~16절에서 다룬 이사야의 예언, 곧 "이방의 갈릴리"에 빛이 비친 사건이 이제 유대와 이방을 아우르는 전 지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4장 마무리

    마태복음 4장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통과하신 시험과, 그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사역의 첫걸음을 함께 보여준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들어가신 예수는 사십 일 금식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1~11절). 돌을 떡으로, 성전에서 뛰어내림으로, 만국의 영광을 통해 이어진 이 시험은 신명기의 말씀으로 하나하나 물리쳐졌는데, 이는 옛적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온전한 순종을 보이신 사건이었다.

     

    요한이 잡힌 것을 계기로 예수는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의 가버나움에 정착하셨다(12~13절). 이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리라"는 말씀의 성취였으며(14~16절), 소외되고 낮았던 이방의 땅에서 오히려 메시아의 빛이 먼저 비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빛의 임재는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공적 선포로 이어졌다(17절).

     

    이 선포에 응답한 것은 종교 엘리트나 학자들이 아니라,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던지던 평범한 어부들이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뒤로하고 조금의 지체도 없이 예수를 따랐다(18~22절). 이는 회개와 천국 복음이 삶 속에서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응답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은 가르침과 전파와 치유로 이어진 예수의 사역이 갈릴리를 넘어 수리아까지 소문이 퍼지고, 마침내 갈릴리·데가볼리·예루살렘·유대·요단 강 건너편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수많은 무리가 모여드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23~25절).

     

    결국 4장은, 시험을 통과하신 왕이 낮고 소외된 땅에서 자신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평범한 이들을 부르사 그 나라를 함께 세울 사람으로 삼으시며, 그 소문이 마침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다음 장(5장)에서 이렇게 모여든 무리를 향해 선포되시는 산상수훈의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며, 왕의 통치가 말씀과 행함, 순종과 부르심을 통해 구체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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