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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마태복음 성경공부
    마태복음 27장

     

     

     

    1.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지심, 유다의 최후 (1-10절)

    27장 1절 말씀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7장 1절 해설

    1) 배경: "새벽에"
    앞 장(26:57-68)에서 예수는 밤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이미 심문을 받았다. 유대 전통상 사형이 걸린 재판을 밤에 여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기에, 날이 밝자 공식 회의를 다시 열어 절차의 외형을 갖추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벽이라는 시간은 이들이 얼마나 서둘렀는지도 보여 준다. 유월절을 앞두고 군중이 동요하기 전에 일을 끝내려는 의도였다.

     

    2) 의논한 사람들: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
    당시 유대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의 지도층을 가리킨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만하다. 일부가 아니라 지도층 전체가 한뜻이 되어 예수를 대적했음을 강조한다. 또한 이들은 '백성의 장로들'로서 백성을 대표하고 보호해야 할 자리에 있었지만, 오히려 그 권위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3) 의논의 목적: "예수를 죽이려고"
    이 회의는 진실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예수를 어떻게 할지 묻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의논했다는 점에서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런 음모는 이미 여러 번 나타났다. 12장 14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일 방도를 꾀했고, 26장 3-4절에서도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가야바의 뜰에 모여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 모의했다. 27장 1절은 그 오랜 계획이 실행 단계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4) 의논의 내용과 다음 절과의 연결
    당시 유대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어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총독에게 있었다(요 18:31). 그래서 이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이루기 위해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는 방법을 택한다(2절). 종교적 죄목(신성모독)으로 정죄한 예수를, 로마 법정에서는 정치적 반역자('유대인의 왕')로 고발하는 방식으로 바꾸게 된다는 점도 이후 재판 장면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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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장 2절 말씀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27장 2절 해설

    1) "결박하여"
    예수님은 이미 겟세마네에서 잡히실 때 체포되셨지만(26:50), 여기서 다시 결박당하시는 모습이 기록된다. 마태는 예수님을 죄인처럼 묶인 모습으로 그린다. 그러나 이 결박은 예수님께서 무력하셔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앞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지 않겠느냐"(26:53)고 말씀하셨다. 곧 스스로 결박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또한 이 장면은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린 아브라함의 이야기(창 22장)를 떠올리게 하며, 순종하는 희생 제물의 이미지와 연결해 묵상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이 연결은 본문이 직접 밝히는 것은 아니므로 묵상 차원의 적용으로 언급하는 것이 안전하다.

     

    2) "끌고 가서"
    가야바의 관저에서 빌라도가 있는 **총독 관저(브라이도리온)**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걸어가신 것이 아니라 끌려가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사야 53장 7절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은 모습과 겹쳐 볼 수 있다. 앞 절에서 본 것처럼 날이 밝은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이 행렬은 서둘러 일을 마치려는 지도자들의 조급함을 보여 준다.

    ⊙ 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곤욕과 고난을 당할 때에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 "총독 빌라도에게"
    빌라도는 AD 26-36년경 유대를 다스린 로마 제5대 총독이다. 평소에는 가이사랴에 머물렀으나 유월절 같은 큰 절기에는 군중 통제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었다. 앞서 1절에서 확인했듯이 사형 집행 권한이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에(요 18:31),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이방 권력의 힘을 빌려야 했다.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자부하던 이들이 이방인 통치자에게 메시아를 넘기는 모순이 여기에 있다. 

     

     

    4) "넘겨 주니라"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넘겨주다(파레도칸, παρέδωκαν)'**이다. 마태복음에서 이 동사는 반복되는 핵심 단어다.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고'(26:15-16), 공회가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빌라도가 십자가형을 위해 예수님을 '넘겨준다'(27:26).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신 말씀(20:18-19)도 이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곧 유다 → 유대 지도자 → 빌라도 → 군병으로 이어지는 '넘겨줌'의 연쇄 속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책임을 지면서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이루어져 간다는 구조를 마태는 보여 준다.

     

     

    27장 3절 말씀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27장 3절 해설

    1)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 때에'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넘겨져 정죄 쪽으로 기울어 가던 시점을 가리킨다. 마태는 유다를 소개할 때 **'예수님을 판 자'**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쓴다(10:4, 26:25, 26:48). 이름 앞에 붙은 이 수식어는 유다의 정체성이 곧 배신 행위로 고정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기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일어난 배신이라는 점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2) "그의 정죄됨을 보고"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받아 사형 쪽으로 넘어가시는 것을 직접 보았다. 여기서 **'정죄됨'**은 공회가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일(26:66)을 가리킨다. 유다가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혹은 예수님께서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나실 것이라 기대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3) "스스로 뉘우쳐"
    이 구절에서 가장 주목할 단어는 **'뉘우쳐(메타멜레테이스, μεταμεληθείς)'**이다. 신약에서 '회개'를 뜻하는 대표 단어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인데, 여기서는 그 단어가 아니라 메타멜로마이가 쓰였다. 이 단어는 후회, 가책, 마음이 아픈 상태에 가까운 의미로,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보다는 **'일을 저지른 것을 후회함'**의 뉘앙스가 강하다. 그래서 유다의 뉘우침은 죄책감과 후회였을 뿐, 하나님께 돌아가는 참된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많다. 다만 이 단어가 항상 부정적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므로(예: 21:29), 문맥을 함께 보며 판단해야 한다.

     

    4)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유다는 자신이 받은 값을 돌려주려 했다. 이 은 삼십은 26장 15절에서 예수님을 넘기는 대가로 받은 금액이다. 출애굽기 21장 32절에서 종이 소에 받혀 죽었을 때 배상하는 값이 은 삼십 세겔이었으므로, 이는 메시아의 값이 종 한 사람의 값으로 매겨진 셈이라는 비극적 상징성이 있다. 또한 스가랴 11장 12-13절의 **"은 삼십을 달아서 내 삯으로 삼았도다"**라는 예언과도 연결된다(마태는 9-10절에서 이를 인용한다).
    유다가 돈을 돌려준 상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장로들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죄를 해결하려고 자신을 부추긴 사람들에게 돌아간 것이며, 이는 다음 절에서 이어질 냉담한 반응과 대비된다.

     

     

    27장 4절 말씀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27장 4절 해설

    1)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는 자신의 죄를 입으로 시인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다.

    첫째, **'무죄한 피'**라는 표현이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임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자의 입에서 나온 이 고백은, 공회의 정죄가 부당했음을 드러내는 내부자의 증언이다. 구약에서 '무죄한 피'는 부당하게 흘린 피를 뜻하며(신 19:10, 21:8-9), 그 책임이 반드시 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태는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불의한 재판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이 주제는 뒤에서 빌라도의 아내(27:19)와 빌라도(27:24)의 말을 통해서도 반복된다.

    신명기 19장 10절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네 땅에 유혈의 죄가 있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위에 돌아갈까 하노라

    신명기 21장 8-9절 

    여호와여 주께서 구속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소서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너희는 이와 같이 하여 무죄한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는 것이니

     

    둘째, **"죄를 범하였도다"**라는 고백이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갔다. 그러나 앞 절에서 본 것처럼 그의 뉘우침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다. 죄를 인정하는 것과 죄 사함을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부인한 뒤 통곡했지만(26:75), 그는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유다와 대비된다.

     

    2)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반응은 차갑고 무책임하다. 이들은 유다를 부추겨 예수님을 넘기게 한 당사자들이었다. 그런데 일이 끝나자 자신들과는 관계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죄를 짓도록 이용하고는 책임은 외면하는 모습이다. 은 삼십을 내주며 거래를 해 놓고, 유다가 가책을 느끼자 그의 양심 문제로 치부해 버린다.
    • 이들은 종교 지도자였다. 죄를 고백하러 온 사람에게 용서와 회개의 길을 안내해야 할 자리에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돌려보낸다. 제사와 속죄를 맡은 사람들이 정작 죄를 고백하는 자 앞에서는 무력하고 냉담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 유다의 말이 무죄 선언임에도 이들은 그것을 무시했다. 진실을 듣고도 이미 정해진 결론을 바꾸지 않으려는 완악함이 드러난다.

    3) "네가 당하라"
    직역하면 **"너나 알아서 하라(네가 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27장 24절에서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하는 말("너희가 당하라")과 같은 어휘가 쓰인다. 곧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 모두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보인다. 마태는 이 반복을 통해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4) 이 구절이 보여 주는 의미

    • 죄책감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유다는 죄를 알았지만 용서받을 곳을 찾지 못했다.
    • 죄를 인정해도 돌아갈 곳이 잘못되면 위로를 얻지 못한다. 유다는 하나님이 아닌 종교 지도자들에게 갔고, 그곳에서 냉담한 거절만 받았다.
    • 예수님의 무죄함이 원수들과 배신자의 입을 통해서도 증언되고 있다.

     

     

    27장 5절 말씀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27장 5절 해설

    1)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주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은을 성소에 던진다. 여기서 '성소(나오스, ναός)'는 성전 본관, 곧 성소 건물을 가리키는 단어다. 일반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구역이므로, 유다가 성전 안쪽까지 들어가 던졌는지, 혹은 성전 쪽을 향해 던졌는지는 본문만으로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더러운 돈을 거룩한 곳에 내던지는 행동이라는 점이다. 이는 자신이 받은 값을 더 이상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절박함을 보여 준다. 또한 그 돈이 성전 지도자들의 손으로 다시 넘어가게 된다는 점에서 6절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2) "물러가서"
    유다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물러나 홀로 떠난다. 이 장면은 앞서 공동체와 함께하던 제자의 자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모습이다. 대제사장들에게는 외면당했고, 예수님께는 돌아가지 않았으며, 다른 제자들에게도 가지 않았다. 고립된 상태에서 절망만 깊어진 모습이 이 짧은 표현에 담겨 있다.

     

    3)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마태는 이 사건을 담담하고 간략하게 기록할 뿐, 감정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구약에서도 아히도벨이 배신 후 스스로 목매어 죽은 기록이 있어(삼하 17:23), 주인을 배반한 자의 최후라는 유사한 구조로 비교하는 해석도 있다. 다만 이는 본문이 직접 연결한 것은 아니므로 참고 수준으로 언급하는 것이 좋다.

    참고로 사도행전 1장 18절에도 유다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의 '목매어 죽음'과 사도행전의 '몸이 터져 창자가 흘러나옴'은 서술이 다르다. 이를 두고 목맨 뒤 줄이 끊어지거나 시신이 떨어져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조화적 해석이 흔히 제시된다. 두 기록은 같은 사건의 서로 다른 측면을 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사도행전 1장 18절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4) 이 구절이 보여 주는 의미

    • 후회만으로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유다는 죄책감에 짓눌렸지만 용서를 구할 곳으로 향하지 못했다.
    • 베드로와 유다는 모두 예수님을 저버렸으나, 한 사람은 돌아와 회복되었고 한 사람은 절망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차이는 죄를 바라보는 방향의 차이이다.
    • 유다의 이야기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겁고 파괴적인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거꾸로 일깨운다.

     

    27장 6절 말씀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27장 6절 해설

    1)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진 은 삼십을 직접 주워 모은다. 4절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며 선을 그었던 이들이, 정작 돈은 자신들의 손으로 거두어들인다. 책임은 외면하면서도 돈의 처리는 자신들이 맡는 모습에서 상관없다고 말하던 태도가 사실과 달랐음이 드러난다. 또한 이 은은 원래 성전 재정에서 나온 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결국 출처가 같은 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2) "이것은 핏값이라"
    대제사장들은 이 돈을 **'핏값(티메 하이마토스, τιμὴ αἵματος)'**이라고 규정한다. 곧 사람을 죽이는 일에 쓰인 대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매우 역설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 이들은 이 돈이 핏값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자신들이 값을 치렀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 4절에서 유다가 말한 **'무죄한 피'**라는 증언을 이들이 간접적으로 시인한 셈이기도 하다. 돈이 핏값이라면 그 피는 죄 없는 피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돈의 부정함은 알아보면서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3)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성전고(코르바나스, κορβανᾶς)'는 성전 헌금이나 성전 재물을 보관하던 창고를 가리킨다.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돈은 성전에 들일 수 없었다. 신명기 23장 18절은 창기의 번 것이나 개 값을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고 규정한다. 대제사장들은 이 규정의 정신을 의식해서 핏값을 성전고에 넣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 철저한 형식주의와 위선이 드러난다.

    • 죄 없는 분을 죽이려는 일에는 거리낌이 없으면서, 그 돈을 어디에 둘지는 율법적으로 따진다.
    • 이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 소경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3:24)고 하신 말씀과 맞닿아 있다.
    • 겉으로는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려는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27장 7절 말씀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27장 7절 해설

    1) "의논한 후"
    대제사장들은 이 돈을 즉흥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함께 의논하여 결정한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할 때도 의논했고(27:1), 이번에도 의논한다. 이들은 회의와 절차에는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의논의 대상이 무죄한 분의 핏값을 처리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형식은 갖추되 본질은 놓친 모습이 다시 드러난다.

     

    2)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토기장이의 밭'**은 토기를 굽는 데 쓰는 진흙을 파내던 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흙을 파낸 뒤에는 쓸모가 적은 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쓸모가 적은 땅이 선택되었다는 점은 핏값이 가치 있는 용도로 쓰이지 못하는 모습과도 어울린다. 이 밭의 정확한 위치는 본문에 나오지 않으며,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남쪽 힌놈의 골짜기 부근으로 전해지나 확정된 것은 아니다.

    또한 **'토기장이'**라는 단어는 구약의 예언과 연결된다. 마태는 9-10절에서 이 사건을 예레미야와 스가랴의 예언과 연결해 설명한다. 스가랴 11장 12-13절에는 은 삼십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부분은 9-10절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 보겠다.

     

    3)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이 밭은 나그네를 위한 묘지로 쓰였다. 여기서 **'나그네'**는 예루살렘에 머물다 죽은 외국인이나 타지에서 온 순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자기 가족 묘지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일을 성전의 정결을 지키면서 돈을 처리하는 선행처럼 여겼을 수 있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 예수님의 핏값이 이방인과 나그네를 위한 땅을 마련하는 데 쓰였다. 이를 두고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묵상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마태가 직접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묵상 차원의 적용으로 언급하는 것이 안전하다.
    • 반대로 죽은 자를 묻는 땅이라는 점에서, 이 밭은 유다의 죽음과 핏값의 오염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4) 이 구절이 보여 주는 의미

    • 종교 지도자들은 돈의 처리는 고민했지만 자신들의 죄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식적 정결에는 민감하면서 본질적인 죄에는 둔감한 모습이다.
    •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계획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으로 밭을 샀지만, 그 일은 성경의 말씀과 맞아떨어지게 된다.
    • 핏값으로 산 밭이 죽은 자를 위한 땅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넘긴 일의 결과가 죽음과 닿아 있음을 보여 준다.

     

    27장 8절 말씀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27장 8절 해설

    1) "그러므로"
    이 접속어는 앞선 일들이 원인이 되어 이름이 생겼음을 보여 준다. 은 삼십이 핏값으로 규정되었고(6절), 그 돈으로 밭을 샀기 때문에(7절) 이 밭은 자연스럽게 **'피밭'**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제사장들은 돈의 부정함을 피하려고 이 밭을 샀지만, 오히려 그 부정함이 밭의 이름으로 영구히 남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죄를 덮으려던 시도가 죄의 기록이 되어 버린 역설이 여기에 있다.

     

    2) "오늘날까지"
    이 표현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하던 시점에도 이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곧 이 사건은 일부만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마태의 독자들도 이 밭에 대해 들었거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마태가 이 사건을 당시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 제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3)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피밭'은 아람어로 **'하겔다마(Ἁκελδαμάχ)'**이며, 사도행전 1장 19절에서도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다의 죽음과 관련하여 밭이 피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반면 마태복음은 핏값으로 산 밭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설명한다. 두 기록은 초점이 다를 뿐 서로 충돌하기보다는 이름의 유래를 다른 측면에서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사도행전 1장 18절에서는 유다가 불의의 삯으로 밭을 샀다고 기록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대제사장들이 그 밭을 샀다고 기록하는 점도 함께 살펴볼 만하다. 이를 두고 유다가 낸 돈으로 산 것이기에 유다의 이름으로 산 것으로 본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다만 이는 해석의 하나로 소개하는 것이 좋다.

    ⊙ 사도행전 1장 18-19절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지매 그들의 말로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 밭이라는 뜻이라

     

     

    27장 9절 말씀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27장 9절 해설

    1)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마태복음은 **"이루어졌다"**는 표현으로 구약 인용을 소개하는 것이 특징이다(1:22, 2:15, 2:17 등). 특히 **"예레미야를 통하여"**라는 표현은 2장 17절에서도 쓰였다. 이 표현은 말씀의 참된 저자가 하나님이시며, 선지자는 그 통로임을 보여 준다. 은 삼십과 밭의 이야기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 마태의 핵심 주장이다.

     

    2) 출처 문제: 예레미야인가, 스가랴인가
    이 구절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부분이다. 인용문의 **핵심 내용(은 삼십, 토기장이에게 던짐)**은 스가랴 11장 12-13절에 나오지만, 마태는 예레미야의 이름을 언급한다.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 복합 인용설: 마태가 스가랴뿐 아니라 예레미야서의 내용도 함께 엮어 인용했다는 견해이다. 예레미야 18장 1-4절에는 토기장이의 집이, 19장 1-13절에는 토기장이의 옹기를 깨뜨리는 장면과 '무죄한 피', 32장 6-15절에는 밭을 사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태가 이 주제들을 한데 묶으면서 더 비중 있는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이름을 대표로 내세웠다고 본다.
    • 선지서 묶음설: 당시 유대 전통에서 예레미야가 선지서 두루마리 모음의 첫머리에 놓이는 경우가 있었기에, 그 이름으로 선지서 전체를 대표했다는 견해이다.

    어느 견해도 확정된 정답은 아니므로, 블로그에는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견해가 있다"**고 소개하는 것이 안전하다.

     

    3)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이 표현에는 예수님의 값이 매겨졌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가격 매겨진 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가격 매긴 자'**는 이스라엘 자손 중 일부, 곧 유다와 대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 의해 값이 매겨지는 비극을 드러낸다. 특히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메시아를 값으로 매겼다는 점에서 더 무겁게 다가온다.

     

    4)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앞서 3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은 삼십은 종 한 사람의 배상 값(출 21:32)이었다. 스가랴 11장에서도 이 금액은 목자였던 선지자의 삯으로 주어지며,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무시를 상징한다. 마태는 이 상징이 예수님의 사건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본다. 곧 하나님의 목자로 오신 예수님이 종의 값으로 평가절하된 것이다.

     

     

    27장 10절 말씀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27장 10절 해설

    1)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은 삼십의 최종 용도가 밝혀진다. 7절에서 대제사장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일이 예언 속에 이미 담겨 있던 내용이라고 말한다. 스가랴 11장 13절에는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의 토기장이에게 던졌다는 말씀이 나온다. 마태는 이 장면을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진 일(27:5)**과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일(27:7)**에 겹쳐 본다. 곧 던져진 은이 토기장이에게 돌아간다는 구조가 예언과 사건 모두에서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스가랴 11장 12-13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않거든 말라 하였더니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내 삯으로 달아 주었도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청지기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들에게서 가격 매겨진 바 그 준가를 여호와의 전에 있는 토기장이에게 던졌노라

     

    2)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이 구절은 예언을 선지자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시한다. 스가랴 11장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목자의 일을 맡고 삯을 받는 역할을 했다. 마태는 이 모습을 예수님의 사건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예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일 뿐이다.
    • 이 표현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유다의 배신, 지도자들의 위선, 밭의 매입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맞아떨어졌다.
    • 마태는 이 인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버림받고 값이 매겨지신 일이 우연한 비극이 아니라 예언된 고난임을 독자에게 확신시키려 한다

    3) 이 구절이 보여 주는 의미

    • 은 삼십과 토기장이의 밭이라는 작은 사건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이루어졌다. 이는 성경 예언의 신실함을 보여 준다.
    • 예수님의 고난은 구약의 흐름 속에 있다. 마태는 예수님을 구약이 기다리던 분으로 제시하며, 이 대목에서 버림받는 목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 1-10절 전체는 유다의 최후와 예언의 성취를 통해,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주권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은 각자의 선택에 책임이 있지만,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흔들리지 않는다.

     

    2. 빌라도의 재판과 바라바 (11-26절)

     

    27장 11절 말씀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27장 11절 해설

    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예수님은 결박된 채 로마 총독 앞에 서신다(27:2). 재판받는 자와 재판하는 자의 구도이지만, 마태는 이 장면을 통해 누가 진정한 왕이고 누가 심판자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훗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하면(25:31-32), 지금 심판받는 자리에 서신 분이 오히려 장차 심판하실 분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또한 이 법정은 가야바 앞의 종교 재판과 달리 로마의 정치 재판이므로, 고발 내용도 달라진다.

     

    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첫 질문은 죄목의 핵심을 곧바로 묻는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했지만(26:65), 로마 총독은 신성모독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곧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고발한 것으로 이해된다(눅 23:2 참조).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질문의 문장에서 **'네가'**가 강조되어 있다. 결박되어 초라하게 서 있는 이 사람이 왕이라는 말이냐는 의아함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 **'유대인의 왕'**은 마태복음 전체에서 중요한 호칭이다. 탄생 때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2:2)고 물었고, 이제 십자가 앞에서 이방인 총독의 입을 통해 같은 호칭이 등장한다. 이후 군병들의 조롱(27:29)과 십자가 위의 죄패(27:37)에서도 반복된다.
    • 마태는 이방인들은 이 호칭을 알아보거나 조롱에 쓰는데, 정작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거부했다는 구조를 보여 준다.

    3)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의 대답은 헬라어로 "쉬 레게이스(σὺ λέγεις)", 직역하면 **"네가 말하고 있다"**이다. 이 표현은 단순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조심스럽고 함축적인 긍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긍정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이는 26장 64절에서 대제사장에게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답하신 것과 같은 표현 방식이다.
    • 동시에 빌라도가 생각하는 의미의 왕은 아니라는 뉘앙스도 담겨 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하셨다. 마태복음에는 이 설명이 없지만, 대답의 여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이는 요한복음의 보충 설명이므로 마태 본문 해석에 참고하는 수준으로 언급하는 것이 좋다.
    •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사실을 말씀하실 뿐이다. 왕이심을 숨기지 않으시되, 정치적 반역자로 이용당할 여지도 스스로 해명하지 않으신다.

    ⊙ 요한복음 18장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는 내 나라가 여기에 있지 아니하도다

     

     

    27장 12절 말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27장 12절 해설

    1)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고발의 주체는 1절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의논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이들은 새벽에 모여 결론을 내린 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고, 이제는 법정에서 직접 고발자로 나선다. 누가복음 23장 2절에는 이들이 백성을 미혹하고,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이라 한다는 취지로 고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마태는 고발의 구체적인 내용을 적지 않고, 고발이 있었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종교 문제로 정죄했던 이들이 로마 법정에서는 정치적 죄목으로 고발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발의 내용까지 바꾸는 모습이다.
    • 고발자들은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층이었으나, 진실을 밝히려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을 관철하려는 자리에 서 있었다.

    2)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은 어떤 변론도 하지 않으신다. 고발이 거짓이어도, 죽음이 눈앞에 있어도 해명하거나 맞서지 않으신다. 이 침묵에는 여러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사야 53장 7절의 성취이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입을 열지 아니하신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마태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독자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 스스로 이 길을 택하셨다는 표시이다. 예수님은 변론하셔서 풀려나실 수도 있었지만, 26장 53-54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이셨다.
    • 고발의 무가치함을 드러내는 침묵으로 볼 수도 있다. 진실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자리에서는 어떤 대답도 소용이 없었다.
    • 베드로전서 2장 23절은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셔도 맞대응하지 않으셨다고 증언한다. 이는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께 의탁하신 모습을 보여 준다.

    ⊙ 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곤욕과 고난을 당할 때에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베드로전서 2장 23절

    욕을 당하시되 맞대응하여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3) 11절과의 대조
    11절에서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하셨다. 곧 왕이심에 대한 질문에는 부인하지 않으시되, 지도자들의 고발에는 침묵하신다. 이 대조가 의미심장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진실을 말씀하시지만,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진리를 증언하는 일과 자신을 변호하는 일은 별개임을 보여 준다.

     

     

    27장 13절 말씀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27장 13절 해설

    1)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이에'는 예수님의 침묵이 계속되자 빌라도가 반응했음을 보여 준다. 고발당하는 사람은 보통 변명하거나 항변하기 마련인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로마 총독으로서 수많은 재판을 다뤄 본 빌라도에게 이 모습은 매우 낯선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입을 열어 대답을 유도한다.

     

    2)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이 질문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 고발의 양과 무게를 일깨우는 말이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많은 죄목을 들어 고발하고 있으니, 해명하지 않으면 불리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 빌라도의 당혹감이 드러난다. 그는 이 고발이 정당한지 의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태는 18절에서 빌라도가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넘긴 것을 알았다고 기록한다. 곧 빌라도는 고발의 진짜 동기가 의심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예수님이 아무 변론도 하지 않으시니 판단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 어쩌면 빌라도는 예수님께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본문은 그의 속마음까지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의 영역으로 두는 것이 좋다.

    3) 빌라도의 위치와 모순
    이 구절에서 빌라도는 재판관이지만, 실제로는 침묵하는 피고 앞에서 오히려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재판하는 자와 재판받는 자의 역할이 역전된 듯한 모습이다. 또한 빌라도는 무죄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게 된다. 이는 진실을 알면서도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27장 14절 말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27장 14절 해설

    1)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마태는 여기서 **"한 마디도"**라는 표현을 써서 침묵의 철저함을 강조한다. 헬라어 본문은 "한 단어(레마)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뜻에 가깝다. 11절에서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하신 것 외에는 고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 침묵은 일시적인 망설임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다. 앞서 12절에서는 대제사장들의 고발에 대한 침묵이었고, 13절에서는 빌라도의 직접적인 재촉에도 침묵이 이어졌으므로, 14절은 누가 묻더라도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결연한 태도를 보여 준다.

     

    2)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빌라도는 '크게' 놀랐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로마 총독으로서 수많은 죄수를 심문해 온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죄수는 살기 위해 변명하고 항변했을 터인데, 예수님은 죽음이 눈앞에 있어도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셨다.
    •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침묵 속에 담긴 위엄과 평안을 느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두려움이나 체념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주권적 태도였다.
    • 빌라도는 이 순간 예수님이 평범한 죄수가 아님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본문은 그의 내면을 자세히 밝히지 않으므로, 놀라움의 구체적인 내용은 해석의 영역으로 두는 것이 안전하다.

    3) 이사야 53장 7절과의 연결
    이사야가 예언한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이 구절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 잠잠한 모습은 무력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길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이 장면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도 독자가 예언을 떠올리도록 구성하고 있다.

    ⊙ 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곤욕과 고난을 당할 때에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4) 이 구절이 보여 주는 의미

    • 침묵은 약함이 아니라 순종과 주권의 표현이다. 예수님은 상황에 끌려가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스스로 걸어가시는 분이다.
    • 재판관이 오히려 놀라고 흔들리는 역전된 구도가 완성된다. 재판받는 분이 실제로는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마태의 역설이 분명해진다.
    • 빌라도는 무언가 특별한 분임을 느끼면서도 결국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는 진리를 목격하고도 응답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며, 다음 절(15절 이하)의 바라바 장면으로 이어진다.

     

    27장 15절 말씀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27장 15절 해설

    1) "명절이 되면"
    여기서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킨다(26:2, 17).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그래서 이 절기에 죄수 한 사람을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는 것은, 해방의 기억과 맞닿아 있어 의미심장하다. 또한 유월절에는 수많은 순례객이 예루살렘에 모여 민족적 감정이 고조되기 쉬웠다. 로마 총독으로서는 군중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고, 이 관례는 민심을 달래는 정치적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월절에 해방을 기념하는 바로 그 시점에, 참된 해방을 가져오실 분이 죽음의 자리에 서 계신다는 점이 이 장면의 깊은 역설이다.

     

    2)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관례의 결정권은 총독에게 있었지만, 선택은 무리의 청원에 따랐다. 곧 군중의 요구가 결과를 좌우하는 구조이다. 이는 이후 빌라도가 군중의 압력에 밀려 결정을 내리게 되는 흐름의 복선이 된다. 빌라도는 이 관례를 통해 예수님을 풀어 줄 명분을 얻으려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본문이 그의 속마음까지 밝히는 것은 아니다.

     

    3)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전례(에토스, ἔθος)'**는 관습적으로 굳어진 관례를 뜻한다. 이 관례가 기록된 로마 측 문헌은 뚜렷하지 않아서, 역사적으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다. 다만 네 복음서가 모두 이 관례를 언급하고 있으므로(막 15:6, 눅 23:17, 요 18:39), 초기 교회가 널리 알고 있던 사실로 보는 견해가 많다.

     

     

    27장 16절 말씀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27장 16절 해설

    1) "그 때에"
    빌라도가 죄수를 풀어 주는 관례를 적용할 시점에, 마침 바라바가 감옥에 있었다는 뜻이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이 상황을 예수님과 바라바가 나란히 군중 앞에 세워지는 배경으로 제시한다. 이 선택의 자리에 두 사람이 함께 서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묵상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본문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묵상 차원의 적용으로 언급하는 것이 안전하다.

     

    2) "바라바라 하는"
    **'바라바(Βαραββᾶς)'**는 아람어 **'바르 아빠(Bar-Abba)'**에서 온 이름으로 보며, 뜻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이름의 의미를 두고 흥미로운 대비가 가능하다.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죄수이고,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다만 이 뜻은 이름의 어원에 근거한 해석이며, 마태가 이를 직접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3) "유명한 죄수"'유명한(에피세모스, ἐπίσημος)'은 널리 알려진, 악명 높은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의 유명함에도 쓰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악명 높은 죄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복음서는 바라바의 죄목을 더 구체적으로 전한다.

    • 마가복음 15장 7절은 반란을 일으키다 살인한 자로 기록한다.
    • 누가복음 23:19도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투옥되었다고 전한다.
    • 요한복음 18장 40절은 그를 강도라고 부른다.

    마태는 이러한 세부 내용을 적지 않고 **'유명한 죄수'**라고만 표현한다. 이는 그의 악명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7장 17절 말씀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27장 17절 해설

    1) "그들이 모였을 때에"
    '그들'은 관례에 따라 죄수 석방을 청원하러 모인 무리를 가리킨다(15절). 마가복음 15장 8절은 이 무리가 관례대로 해 주기를 요구하며 올라왔다고 기록한다. 즉 이 군중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죄수 석방이라는 관례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지를 대제사장들이 설득하는 과정이 다음 절(20절)에서 나타난다.

     

    2)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빌라도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 상황을 주도하려 한다. 예수님의 침묵 앞에서 판결을 내리지 못하던 그는, 이 관례를 책임을 군중에게 돌리는 출구로 삼으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문이 그의 속마음을 밝히는 것은 아니므로 추측의 영역으로 두는 것이 좋다. 결과적으로 재판관이 결정을 군중에게 넘겨 버리는 모습이 되며, 이는 24절의 손을 씻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복선이 된다.

     

    3)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빌라도는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 비교하게 한다. 이 질문에는 몇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

    • 바라바는 악명 높은 죄수(16절)이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다. 빌라도는 누가 봐도 명백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18절에서 마태는 빌라도가 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넘겨진 줄 알았다고 밝힌다.
    • **'그리스도라 하는'**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호칭을 이방인 총독의 입으로 말하게 하는 대목이다. 빌라도는 신앙 고백으로 한 말이 아니라 구별을 위한 호칭으로 썼을 가능성이 크지만, 마태는 독자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앞서 11절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이 나왔던 것과 같은 역설적 구조이다.

    4)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은 선택의 책임을 군중에게 돌리는 형식을 띤다. 그러나 빌라도는 재판관으로서 무죄한 사람을 풀어 줄 권한이 이미 있었다. 관례를 이용해 판결의 부담을 피하려는 모습은 그의 우유부단함을 드러낸다. 진리를 알면서도 책임 있는 결정을 군중에게 떠넘기는 인간의 모습이 여기에 나타난다.

     

     

    27장 18절 말씀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27장 18절 해설

    1) "이는"
    이 접속어는 빌라도가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그 이유를 밝혀 준다.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님을 나란히 세우면 군중이 당연히 예수님을 택할 것이라 기대했을 수 있다. 그는 이 고발이 정당한 죄목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본문은 그의 기대를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의 영역이다.

     

    2) "그가 ... 줄 앎이더라"
    마태는 빌라도의 내면 인식을 직접 서술한다. 빌라도는 심문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로마에 대한 반역의 증거를 찾지 못했고, 고발자들의 태도에서 다른 의도가 있음을 눈치챘다. 로마 총독으로서 수많은 고발과 모함을 다뤄 본 경험이 있었을 것이므로, 이 사건의 석연치 않은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빌라도가 진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뒤에서 그가 내리는 결정의 책임이 가볍지 않음을 보여 준다.

     

    3) "그들의 시기로"
    '시기(프도노스, φθόνος)'는 남이 가진 것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넘긴 핵심 동기가 진리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질투였다는 것이다. 이들이 시기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 예수님께서 백성에게 큰 인기와 영향력을 얻으셨다(21:8-11, 21:46).
    • 성전에서 지도자들의 권위와 이익을 위협하는 말씀과 행동을 하셨다(21:12-13, 23장).
    •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1장 47-48절에는 이런 우려가 드러난다.

    ⊙ 요한복음 11장 47-48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를 그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으리니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4) "예수를 넘겨 준"
    2절에서 본 '넘겨주다(파라디도미)' 동사가 다시 쓰인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일이 종교적 정의 때문이 아니라 시기 때문이었음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앞서 이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종교적 명분을 내세웠고, 빌라도 앞에서는 정치적 반역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마태는 그 이면의 진짜 동기를 폭로한다.

     

     

    27장 19절 말씀

    총독이 재판석이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7장 19절 해설

    1)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재판석(베마, βῆμα)'은 총독이 공식 판결을 내리는 자리를 가리킨다. 빌라도가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이제 판결을 내릴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내의 전갈이 도착한다. 마태는 판결 직전이라는 시점을 강조함으로써, 빌라도에게 마지막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기회가 주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후 빌라도는 같은 재판석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게 된다(27:26). 요한복음 19장 13절에도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2)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빌라도의 아내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후대 전승에서는 '프로클라' 등의 이름이 전해지지만, 성경 본문에는 근거가 없다. 로마의 속주 총독은 부임지에 아내를 동행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그녀가 예루살렘에 함께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보내 전갈을 전했다. 재판이 진행 중인 공적인 자리에 여성이 직접 나서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볼 수 있으나, 본문이 이유를 밝히지는 않는다.

     

    3)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이 말에는 두 가지 핵심이 담겨 있다.

    • **'옳은 사람(디카이오스, δίκαιος)'**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의인으로 증언하는 말이다. 이방인 여인의 입에서 나온 이 증언은, 유다의 '무죄한 피'(27:4), 빌라도 자신의 '시기로 넘긴 줄 앎'(27:18)과 함께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한 증언의 흐름을 이룬다. 나중에 백부장도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27:54)라고 고백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거부한 분을 이방인들이 알아보는 구도가 반복된다.
    •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는 관여하지 말라는 간곡한 만류다. 예수님을 처형하는 일에 연루되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는 빌라도가 24절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라고 말하는 장면과 대비된다. 아내는 상관하지 말라고 했지만, 빌라도는 결국 상관하게 되고 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4)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꿈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뜻을 알리시는 방편으로 자주 등장한다. 요셉이 꿈으로 지시를 받았고(1:20, 2:13, 2:19), 동방박사들도 꿈으로 경고를 받았다(2:12). 이번에는 이방인 여인이 꿈을 통해 경고를 받는다. 이 꿈을 하나님께서 빌라도에게 주신 경고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다만 꿈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고, 하나님이 보내신 꿈이라고 본문이 직접 밝히는 것도 아니므로 해석의 영역이다.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는 고통을 많이 겪었다는 뜻이다. 꿈 때문에 마음이 크게 괴로웠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수난 장면을 미리 보았을 수도 있으나 본문은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 '오늘'은 바로 오늘 새벽에 꾼 꿈이라는 점에서 재판의 시점과 맞물려 있음을 강조한다.

     

     

    27장 20절 말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7장 20절 해설

    1)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1절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의논했고, 12절에서 고발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다시 등장한다. 이들은 빌라도 앞에서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군중 속으로 들어가 직접 움직인다. 18절에서 마태가 밝힌 시기라는 동기가 여기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모습이다.

     

    2) "무리를 권하여"
    '권하여(에페이산, ἔπεισαν)'는 설득하다, 부추기다, 마음을 움직이다라는 뜻이다. 군중은 17절에서 보았듯 관례에 따라 죄수 석방을 청원하러 모인 사람들이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뜻이 확고했다기보다, 지도자들의 설득에 따라 방향이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군중은 독립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권위 있는 자들의 말에 휩쓸렸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21:9)와 이 무리가 같은 사람들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다만 군중의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모습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 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질문을 던지는 짧은 틈을 이용했다. 빌라도가 아내의 전갈을 받고 있던 순간이 오히려 설득의 시간이 된 셈이다.
    • 진리를 가려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거짓된 여론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 비극적이다.

    3)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설득의 내용은 바라바를 석방해 달라고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16절에서 소개된 악명 높은 죄수가 선택 대상이 된 것이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놓아주지 않기 위해, 가장 위험한 죄수를 대신 택하게 만든다. 이는 이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사회에 위험한 인물이 풀려나는 것조차 감수했음을 보여 준다. 정의와 공익보다 자신들의 목적이 우선이었다.

     

    4)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설득의 최종 목표가 분명히 드러난다. 단지 바라바를 택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라는 요구까지 하게 만든 것이다. 앞서 1절에서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있던 **'죽이려는 의도'**가 이제 군중의 목소리로 바뀌어 나온다. 그리고 이 외침은 다음 절들에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2-23절)라는 요구로 더욱 격해진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손을 직접 더럽히지 않고 군중의 입을 빌려 목적을 이루려 했다고 볼 수 있다.

     

     

    27장 21절 말씀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줄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7장 21절 해설

    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빌라도는 17절에서 던진 질문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군중 사이에서 이미 설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눈치챘을 수도 있고, 혹은 예수님을 택하기를 기대하며 재차 확인했을 수도 있다. 다만 본문은 그의 의도를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의 영역이다. 분명한 것은 빌라도가 선택권을 군중에게 맡긴 채 계속 질문만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죄함을 알면서도 직접 판결하지 않고 군중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이 그의 우유부단함을 보여 준다.

     

    2)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은 선택지를 두 사람으로 좁혀 놓은 형식이다. 한쪽은 악명 높은 죄수 바라바(16절), 다른 한쪽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다. 빌라도가 보기에 답이 분명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운명을 군중의 선택에 맡기는 구조가 되었다. 재판관이 판결의 책임을 다수의 요구 뒤로 숨기는 모습이기도 하다.

     

    3)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군중의 대답은 짧고 단호하다. 마태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이 한마디로 군중의 선택을 기록한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죄인을 택하고 의인을 버리는 선택이다. 행 3장 14절에서 베드로도 이 일을 두고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였다고 말한다.
    • 군중은 예수님을 놓아주자는 쪽을 택하지 않았다. 지도자들의 설득이 그만큼 강하게 작용했음을 보여 준다.

     

     

    27장 22절 말씀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7장 22절 해설

    1)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러면'은 군중이 바라바를 택한 결과를 받아들여 던지는 질문임을 보여 준다.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기로 한 이상, 남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지를 다시 군중에게 묻는다. 17절과 21절에서 이어진 질문 던지기가 세 번째로 반복되는 셈이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지 않고 계속 군중의 의견을 구하는 모습은 그의 우유부단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2)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 질문에는 몇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

    • 빌라도는 17절에서처럼 **'그리스도라 하는'**이라는 호칭을 쓴다. 그에게는 신앙 고백이 아니라 구별을 위한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마태는 독자에게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묻게 만든다. 이 질문은 군중뿐 아니라 복음서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 **"내가 어떻게 하랴"**는 책임을 군중에게 돌리는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어떻게 할지 판결할 권한은 빌라도에게 있었다. 18절에서 시기 때문에 넘겨진 줄 알았고, 19절에서 아내의 경고까지 받았음에도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군중에게 맡기는 모습이다.
    • 빌라도는 이 질문을 통해 군중이 마음을 바꾸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다만 본문은 그의 속마음을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의 영역이다.

    3) "그들이 다 이르되"
    '다'라는 표현은 군중의 외침이 한목소리였음을 강조한다. 20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설득한 결과, 무리 전체가 하나의 요구로 모였다. 마태는 이 장면에서 군중이 일치된 목소리로 의인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다'는 뒤의 25절에서 **"온 백성이 대답하여"**라는 표현으로 이어져, 책임의 무게를 더한다.

     

    4)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이 외침은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십자가형을 요구한다. 십자가형은 로마가 반역자와 노예, 중범죄자에게 집행하던 가장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유대 지도자들이 신성모독으로 정죄한 일(26:65)이 로마식 처형 요구로 바뀌었다. 유대 율법의 처형 방식은 돌로 치는 것이었으나, 십자가형은 로마 권력의 손을 통해 집행된다. 이는 이방인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고(20:19)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 신명기 21장 23절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한다. 군중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의 자리에 서시는 일이 이 요구를 통해 시작된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이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심으로 해석한다. 
    • 바라바를 택한 지 불과 몇 마디 만에 군중의 요구는 한 사람의 석방에서 의인의 처형으로 번졌다. 악한 선택이 더 큰 악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 준다.

    ⊙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니라

    ⊙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27장 23절 말씀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7장 23절 해설

    1)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어찜이냐'는 **"도대체 왜 그러느냐", "어째서 그러느냐"**는 뜻의 반문이다. 빌라도는 군중의 요구가 이유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 근거를 묻는다. 18절에서 시기 때문에 넘겨진 줄 알았고, 19절에서 아내의 경고까지 받은 그가 군중의 요구에 의문을 품고 있음이 드러난다. 다만 그는 여기서도 스스로 판결하지 않고 질문만 던진다.

     

    2)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하는 말이다. 빌라도는 고발할 만한 구체적인 악행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누가복음 23장 4, 14, 22절에도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이 질문에 군중은 답하지 못한다. 십자가형을 요구하면서도 그 이유를 대지 못하는 모습은 이 요구가 진실이 아니라 설득과 감정에서 나왔음을 보여 준다. 유다(27:4), 빌라도의 아내(27:19)에 이어 빌라도 자신의 입으로도 무죄함이 증언되는 셈이다.

     

    3)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군중은 이유를 대는 대신 목소리를 높인다. 근거가 없을 때 소리의 크기로 밀어붙이는 모습이다. '더욱'이라는 표현은 22절보다 외침이 한층 거세졌음을 보여 준다. 빌라도의 질문이 군중의 마음을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격앙시켰다는 점에서, 이미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5장 14절과 누가복음 23장 23절에도 군중이 더욱 큰 소리로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4)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2절과 같은 요구가 그대로 반복된다. 새로운 이유나 설명은 없고, 같은 말만 더 크게 외칠 뿐이다. 이 반복은 군중의 결심이 이미 굳어졌음을 보여 주며, 빌라도가 더 이상 이 흐름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27장 24절 말씀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7장 24절 해설

    1)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빌라도는 질문과 설득으로 군중을 돌이키려 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소란이 커져 민란으로 번질 조짐이 보였다. 유월절에는 수많은 순례객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민란은 총독으로서 가장 피해야 할 일이었다. 속주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면 로마 황제에게 책임을 추궁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9장 12절에는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압박하는 장면이 있어, 빌라도가 처한 정치적 부담을 짐작하게 한다. 결국 빌라도는 무죄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안전과 질서 유지를 택했다. 정의보다 정치적 계산이 앞선 순간이다.

     

    2)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손을 씻는 행위는 로마가 아니라 유대의 관습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명기 21장 6-7절에는 살인자를 알 수 없는 경우 성읍의 장로들이 손을 씻으며 "우리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라고 선언하는 규례가 있다. 시편 26편 6절, 73편 13절에도 손을 씻어 결백을 나타내는 표현이 나온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무죄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 행동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일에 자신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판결을 내릴 권한은 그에게 있었으므로, 이 행동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피하려는 몸짓에 가깝다.
    •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석방하지 않았고, 그 모순을 행동으로 덮으려 했다.
    • 물로 손을 씻는 일은 겉모습만 깨끗하게 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마음의 책임은 물로 씻어낼 수 없다.

    3)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빌라도는 예수님의 피, 곧 죽음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무죄함을 다시 확인하는 증언이 된다. 무죄한 피이기에 책임 문제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유다(27:4), 빌라도의 아내(27:19)에 이어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을 의인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그의 실제 행동과 모순된다. 판결을 내려 십자가형을 허락한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말로는 무죄를 주장해도 행동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점은 후대 신앙고백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표현으로 빌라도의 이름이 기록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4) "너희가 당하라"
    이 표현은 4절에서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했던 **"네가 당하라"**와 같은 어휘이다. 곧 유다에게는 대제사장들이, 대제사장들과 군중에게는 빌라도가 같은 말로 책임을 떠넘긴다. 마태는 이 반복을 통해 아무도 이 일의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책임을 서로 떠넘긴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다, 대제사장들, 빌라도, 군중이 모두 각자의 몫을 가지고 있다.

     

     

    27장 25절 말씀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7장 25절 해설

    1)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라오스, λαός)'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이다. 지금까지는 '무리(오클로스)'라는 단어가 주로 쓰였는데(27:15, 20, 24), 여기서 '백성'이라는 단어로 바뀐 점이 주목된다. 마태가 이 표현으로 이스라엘의 책임을 강조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2)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이 외침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과 자손이 지겠다는 선언이다. 구약에서 피 흘린 책임이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표현이 쓰였다(삼하 1:16, 겔 33:4, 행 18:6 참조).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군중은 자신들이 한 말의 무게를 알지 못한 채 이 말을 외쳤다. 이 말은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나온 경솔한 외침이다.
    • 24절의 빌라도는 **"나는 무죄하니"**라고 했고, 군중은 **"우리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답한다. 두 사람의 말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대비된다.
    • '우리 자손'이라는 표현은 자신들의 결정이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27장 26절 말씀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27장 26절 해설

    1)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이에'는 24-25절의 손 씻음과 군중의 외침 직후에 판결이 내려졌음을 보여 준다. 빌라도는 무죄함을 알면서도 군중의 요구에 따라 바라바를 석방한다. 16절에서 악명 높은 죄수로 소개된 바라바가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죄 있는 자가 풀려나고 죄 없으신 분이 정죄되는 역전이 일어난다. 정의가 뒤집힌 모습이다.
    • 바라바는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면서 풀려난다. 이 장면을 대속(대신 죽으심)의 그림으로 묵상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마태가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묵상 차원의 적용이다.
    • 마태는 바라바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자리에 다른 한 분이 서신 사실만 남는다.

    2) "예수는 채찍질하고"
    '채찍질(프라겔로오, φραγελλόω)'은 로마가 십자가형 집행 전에 가하던 가혹한 형벌이다. 채찍 끝에 뼛조각이나 금속 조각을 달아 몸을 찢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형벌만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었다. 마태는 이 고통을 한 단어로 간결하게 기록할 뿐,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사야 53장 5절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와 연결해 묵상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구약의 고난받는 종 본문과 겹쳐 읽는 해석이므로 참고 수준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
    • 예수님은 20:19에서 이방인에게 넘겨져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이 예고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 빌라도에게 무죄함을 인정하면서도 채찍질을 명한 모순이 있다. 누가복음 23장 16절에서는 빌라도가 채찍질하여 놓겠다고 제안하기도 하는데, 무죄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불의한 타협이 드러난다.

    3)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여기서 **'넘겨 주니라(파레도켄, παρέδωκεν)'**는 2절에서 본 '넘겨주다' 동사가 다시 쓰인 것이다. 유다에서 시작된 '넘겨줌'의 연쇄가 이 구절에서 마지막 고리에 이른다.

    • 유다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 빌라도 → 군병들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집행할 군병들의 손으로 넘어가신다.
    • 빌라도는 스스로 손을 씻었으나, 판결을 내려 예수님을 넘긴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다. 24절의 선언과 26절의 행동이 정면으로 모순된다.

     

    3. 군병들의 조롱 (27-31절)

    27장 27절 말씀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7장 27절 해설

    1)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이에'는 26절의 판결 직후에 이어지는 일임을 보여 준다. 이 군병들은 총독 휘하의 로마 군인들이다. 유대 지방에 주둔한 로마군은 주로 이방인 지역에서 모집된 보조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수많은 사형수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다. 앞서 예수님이 이방인에게 넘겨져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하신 예고(20:19)가 이 장면에서 그대로 이루어진다. 마태는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서 이방인 군병들의 손으로 넘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2)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관정(프라이토리온, πραιτώριον)'은 총독의 공관 또는 관저를 가리킨다. 이곳이 예루살렘에서 헤롯 궁이었는지, 안토니아 요새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리며, 본문만으로는 확정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군병들이 예수님을 공개된 재판 장소에서 건물 안쪽으로 데려갔다는 점이다.

    이는 군중의 시선에서 벗어난 폐쇄된 공간이었으며, 군병들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리였다. 같은 요한복음 18장 28절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정결을 지키기 위해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 기록과 대비하면, 의식적 정결에는 민감하면서 무죄한 이의 처형에는 거리낌이 없던 모습이 다시 드러난다. 

     

    3)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군대(스페이라, σπεῖρα)'는 로마의 부대 단위로, 원래 약 600명 규모의 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여기서 실제로 몇 명이 모였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으며, 관저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다수 모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표현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온'**이라는 표현은 관저에 있던 군인들이 거의 다 모였음을 강조한다. 한 사람의 죄수를 향해 많은 군인이 둘러서는 모습은 그 장면의 잔혹함과 수치를 부각한다.
    • 이는 군병들이 구경거리로 삼기 위해 모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군병들에게, 이 일은 조롱할 만한 구실이 되었다.
    • 마태는 예수님이 홀로 수많은 군병 앞에 서 계신 모습을 보여 준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했고(26:56), 곁에 아무도 없는 고독이 이 장면에 담겨 있다.

     

    27장 28절 말씀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7장 28절 해설

    1) "그의 옷을 벗기고"
    군병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벗긴다. 이 행동에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채찍질로 상처 입은 몸에서 옷을 벗기는 일은 큰 고통과 수치를 동반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옷을 벗기는 것은 죄수의 인격과 존엄을 박탈하는 행위였다.
    • 이 장면은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존엄을 빼앗기는 모습이다. 빌립보서 2장 7-8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셨다고 증언한다. 
    • 이 옷은 35절에서 군병들이 제비 뽑아 나누는 대상이 된다. 예수님은 옷마저 남김없이 내어 주시는 분으로 그려진다.

    ⊙ 빌립보서 2장 7-8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홍포를 입히며"
    '홍포(클라뮈다 코키네, χλαμύδα κοκκίνην)'는 붉은색 또는 진홍색 겉옷을 가리킨다. 군병들이 입던 짧은 외투였을 가능성이 크며, 당시 로마 군인이나 고위 관리가 입던 붉은 망토를 연상시킨다. 이 행동에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홍포는 왕이나 황제의 자색 옷을 흉내 낸 것이다. 마가복음 15장 17절과 요한복음 19장 2절은 이 옷을 자색 옷으로 기록한다. 마태는 붉은색으로, 마가와 요한은 자색으로 표현하는데, 두 색이 비슷한 계열이어서 같은 옷을 다르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 군병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27:11)을 조롱의 소재로 삼았다. 진짜 왕의 옷이 아니라 낡은 군인 외투를 입혀 왕 흉내를 내는 것이다.
    • 그러나 조롱하는 행동이 오히려 예수님의 진짜 정체를 드러낸다. 군병들은 비웃으려 했지만, 마태는 이 장면에서 진정한 왕이 왕의 옷을 입고 계신 역설을 보여 준다.

     

    27장 29절 말씀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27장 29절 해설

    1)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군병들은 가시가 달린 식물을 엮어 관처럼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다. 어떤 식물이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으며, 대추나무 종류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확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 관은 황제가 쓰던 월계관이나 왕관을 흉내 낸 것이다. 왕의 영광을 상징하는 관이 고통을 주는 도구로 바뀐 것이다.
    • 가시는 머리를 찔러 피를 흘리게 했을 것이므로, 이 조롱은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학대였다.
    • 창세기 3장 18절에서 가시덤불은 죄로 인해 땅이 받은 저주의 결과로 등장한다. 이를 근거로 저주를 상징하는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장면을 묵상하는 이들이 있다. 다만 이는 본문이 직접 연결한 것은 아니므로 묵상 차원의 적용이다.
    • 군병들은 왕관을 흉내 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고난 받는 왕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을 만들어 냈다.

    2)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갈대(칼라모스, κάλαμος)'는 왕의 홀(지팡이)을 흉내 낸 것이다. 왕은 오른손에 홀을 들어 통치권을 상징했으므로, 군병들은 가장 약하고 쓸모없는 갈대를 쥐여 주며 조롱한다. 이 갈대는 30절에서 예수님의 머리를 치는 도구로 다시 쓰이므로, 조롱이 모욕에서 폭행으로 이어짐을 보여 준다.

     

    3)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무릎을 꿇는 행위는 왕에게 드리는 경배의 자세이다. 군병들은 경배하는 척하며 조롱한다. 이 장면에는 깊은 역설이 있다.

    • 마태복음에서 무릎 꿇는 경배는 이미 동방박사들(2:11)과 나병환자, 제자들의 행동으로 나타났다. 진심 어린 경배가 있던 자리에, 이제 가짜 경배가 등장한다.
    • 군병들은 장난으로 무릎을 꿇었지만, 빌립보서 2장 10절은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조롱의 몸짓이 장차 이루어질 참된 경배를 미리 보여 주는 것처럼 읽을 수 있다. 다만 이는 바울 서신에 근거한 신학적 묵상이므로 마태 본문 해석에서는 참고 수준이다.
    • '희롱하다(엠파이조, ἐμπαίζω)'는 놀리고 조롱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넘겨져 희롱당하실 것이라고 하신 예고(20:19)가 이 단어로 기록되어 있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 마태복음 20장 19절 

    그들이 능욕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는 사흘 만에 일으킴을 받으리라

     

    4)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이 말은 로마 황제에게 올리던 **"아베 카이사르(황제여 만수무강하소서)"**라는 인사를 흉내 낸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은 11절 빌라도의 질문, 2장 2절 동방박사의 질문과 이어지는 마태복음의 핵심 호칭이다. 군병들은 조롱의 말로 썼지만, 이 말은 사실을 선포하는 말이 된다.
    • 마태복음에서 이 호칭은 이방인들의 입에서만 나온다(2:2 동방박사, 27:11 빌라도, 27:29 군병, 27:37 죄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표현으로 조롱한다(27:42). 이방인들은 조롱이든 경배든 **'유대인의 왕'**이라 부른다는 점이 눈에 띈다.
    • **"평안할지어다(카이레, χαῖρε)"**는 기뻐하라, 안녕하라는 뜻의 인사이다. 가장 평안을 필요로 하는 분께 평안을 가장한 조롱을 던지는 아이러니가 있다.

     

    27장 30절 말씀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27장 30절 해설

    1) "그에게 침 뱉고"
    침을 뱉는 행위는 고대 사회에서 극심한 멸시와 모욕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이 장면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마태복음 26장 67절에서 공회 앞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시작된 모욕이 이방인 군병들에게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모욕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죄가 민족을 가리지 않음을 보여 준다.
    • 예수님은 이 모든 모욕을 피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신다. 침묵 속의 순종이 이어진다.

    2) "갈대를 빼앗아"
    29절에서 왕의 홀을 흉내 내어 오른손에 들려 준 갈대를 군병들이 다시 빼앗는다. 이 행동에는 왕 흉내 놀이의 본색이 드러난다.

    • 군병들이 갈대를 쥐여 준 것은 존중이 아니라 조롱의 소품이었음이 분명해진다. 필요가 없어지자 곧바로 빼앗아 폭행 도구로 쓴다.
    • 홀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인데, 그것을 빼앗는 행동은 군병들이 왕권을 한낱 장난거리로 여겼음을 보여 준다.
    • 하나님의 아들이 손에 든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빼앗기시는 모습이다.

    3) "그의 머리를 치더라"
    군병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계속해서 때렸다. 이 구타는 가시관을 씌운 머리에 가해졌으므로, 가시가 더 깊이 박히며 큰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치더라(에튀프톤, ἔτυπτον)'는 반복해서 때리는 행동을 나타내는 시제로 쓰였다. 한 번의 타격이 아니라 계속된 폭행이었음을 암시한다.
    • 머리는 왕관을 쓰는 자리이다. 왕관 흉내를 낸 자리를 갈대로 내리치는 행동은 왕권을 철저히 모욕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 이 조롱과 폭행 앞에서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맞서거나 저항하지 않으신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의 **"욕을 당하시되 맞대응하여 욕하지 아니하시고"**가 그대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27장 31절 말씀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7장 31절 해설

    1) "희롱을 다 한 후"
    '다 한 후'는 군병들이 만족할 때까지 조롱을 계속했음을 보여 준다. 27절에서 온 군대가 모인 뒤 옷을 벗기고(28절), 관과 갈대를 주고(29절), 침 뱉고 때리는(30절) 일이 이어졌다. 이 조롱은 짧은 장난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 동안 이어진 학대였다. 군병들에게 이 일은 사형수를 앞에 두고 벌이는 오락에 가까웠으나, 예수님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수치의 시간이었다. 마태는 이 과정을 길게 묘사하지 않고 **"희롱을 다 한 후"**라는 한마디로 정리한다.

     

    2)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군병들은 왕 흉내의 소품이었던 홍포를 벗기고, 예수님 자신의 옷을 다시 입힌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홍포를 벗기는 행동은 조롱 놀이가 끝났음을 뜻한다. 이들에게 홍포는 잠시 쓰다 버리는 도구일 뿐이었다.
    • 예수님의 본래 옷을 다시 입힌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십자가로 가는 분이 바로 그 예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표시로 볼 수 있다. 조롱의 옷이 아니라 자기 옷을 입으신 채 길을 가신다.
    • 이 옷은 35절에서 군병들이 제비 뽑아 나누는 대상이 된다. 요한복음 19장 23-24절은 이 옷이 통으로 짠 속옷이었다고 전한다. 

    3)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마태는 이 이동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나가는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이다. 20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말씀하셨고, 26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졌으며, 이제 그 예고가 집행 단계로 들어선다. 이 문장은 재판과 조롱의 시간이 끝나고 처형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4) "끌고 나가니라"
    '끌고 나가다(아파고, ἀπάγω)'는 죄수를 처형 장소로 인도하는 표현으로도 쓰이는 동사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성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암시한다. 로마의 처형은 도시 바깥에서 이루어졌으며, 32절에서 이어지는 골고다도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증언한다. 
    • 예수님은 스스로 걸어가시지만 군병들에게 끌려가시는 모습이다. 이는 2절에서 결박되어 끌려가신 모습과 겹치며, 이사야 53장 7절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을 떠올리게 한다.
    • 한때 **"다윗의 자손 호산나"**의 환영 속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왕(21:9)이, 이제 조롱을 당한 뒤 성 밖으로 끌려 나가신다. 환영과 배척의 극적인 대조이다.

    ⊙ 히브리서 13장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 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곤욕과 고난을 당할 때에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마태복음 21장 9절

    앞에 가고 뒤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니라

     

     

    4.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 (32-44절)

     

    27장 32절 말씀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27장 32절 해설

    1) "나가다가"
    군병들이 예수님을 성 밖 처형장으로 인도하는 도중의 일이다. 로마의 관례상 사형수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의 가로 나무를 직접 지고 처형 장소까지 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은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셨다고 기록한다. 마태는 그 과정에서 시몬이 대신 지게 된 순간을 전한다. 앞서 채찍질과 조롱으로 몸이 크게 상하셨기에 더 이상 지고 가기 어려운 상태였을 가능성이 있다.

    ⊙ 요한복음 19장 17절

    예수께서 자기가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 곧 해골의 곳에 나가시니

     

    2)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구레네(Cyrene)'**는 북아프리카(지금의 리비아 지역)에 있던 도시로,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이 거주했다(행 2:10, 6:9 참조). 시몬은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본문은 이를 직접 밝히지 않는다. 그는 우연히 그 길에서 만난 사람으로 기록된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마가복음 15장 21절은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한다. 이는 마가의 독자들이 이 가족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며, 시몬의 가족이 후에 초대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루포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같은 인물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 열두 제자는 모두 도망했고(26:56),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은 이름 없던 낯선 이방 땅 출신의 한 남자였다. 제자도의 자리가 뜻밖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모습이다.

    ⊙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나

     

    3)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억지로 지우다(앙가류오, ἀγγαρεύω)'**는 로마 군인이나 관리가 민간인을 강제로 동원해 짐을 지게 하던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5장 41절의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고"**에서도 쓰였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시몬은 자원해서 진 것이 아니라 강제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시작된 일이 그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일이 되었다.
    •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문자 그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뒤따른 사람이 되었다. 
    • 한 사람이 억지로 짐을 졌다는 사실이 무력하게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겹치며, 수난의 현실이 구체적이고 처절하게 드러난다.

     

     

    27장 33절 말씀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27장 33절 해설

    1)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골고다(Γολγοθᾶ)'**는 아람어 '굴갈타'에서 온 이름으로, 뜻은 **'해골'**이다. 마태는 아람어 지명을 쓰고 곧바로 그 뜻을 풀어 설명한다. 이는 아람어를 모르는 독자를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름의 유래는 본문이 밝히지 않으며, 여러 견해가 있다. 언덕의 모양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견해, 그곳이 처형장이어서 죽음과 연관된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 등이 있다. 어느 쪽도 확정된 것은 아니다.
    • 라틴어 성경(불가타)에서 해골을 뜻하는 **'칼바리아(Calvaria)'**로 번역되었고, 여기서 영어 **'갈보리(Calvary)'**라는 이름이 나왔다.
    • 정확한 위치도 본문에는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음 19장 20절은 성에서 가까운 곳이었다고 하고, 히브리서 13장 12절은 성문 밖이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는 현재 예루살렘 성묘 교회 자리로 보는 견해와 다른 지점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으며,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2) "이르러"
    짧은 동사이지만 긴 수난의 여정이 목적지에 닿았음을 보여 준다. 새벽의 공회(27:1)에서 시작되어 빌라도의 재판, 군병들의 조롱을 거쳐 마침내 처형 장소에 이른 것이다. 마태는 이 도착을 담담하게 서술할 뿐, 감정적인 묘사를 덧붙이지 않는다. 이는 이후 십자가 장면 전체에서 마태가 보여 주는 절제된 기록 방식과도 이어진다.

     

    3) 장소가 주는 의미
    **'해골의 곳'**이라는 이름은 죽음이 지배하는 자리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죽음에 가까운 장소에서 최후를 맞이하신다는 점에서, 이 장소는 인간의 죄와 죽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27장 34절 말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27장 34절 해설

    1) "쓸개 탄 포도주를"
    '쓸개(콜레, χολή)'는 쓴맛을 내는 물질을 가리키는 단어로, 정확히 어떤 물질이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마가복음 15장 23절은 같은 장면을 몰약을 탄 포도주로 기록한다. 몰약은 진통과 마취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두 기록을 함께 보면 쓴맛 나는 진통성 혼합물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두 표현의 관계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리며 확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마가복음 15장 23절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 잠언 31장 6절에는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어, 사형수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이런 음료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유대 전승에서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사형수에게 이런 음료를 준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이 전승의 시기와 정확성은 논쟁이 있다.
    • 시편 69편 21절은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고 노래한다. 마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쓸개'라는 단어가 일치하여 이 시편과 겹쳐 읽는 이들이 많다. 이 연결은 참고 수준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

    2)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하려 하였더니'는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누가 이 음료를 주었는지 마태는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군병들이 주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본문은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이 음료가 호의에서 나온 것인지, 조롱에서 나온 것인지도 본문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

     

    3)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이 구절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맛은 보셨으나 마시기를 거절하셨다는 점이다. 이 행동에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고통을 무디게 하는 수단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온전한 정신으로 끝까지 감당하시려는 모습을 보이신다. 다만 마태는 거절의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해석의 영역이다.
    • 맛을 보셨다는 점은 무엇인지 아시고도 거절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모르고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선택임을 보여 준다.
    • 예수님은 26장 39절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으나, 곧이어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으시고 마시겠다는 결단이 이 장면에서도 이어진다고 묵상하는 이들이 많다. 
    • 26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과 연결해 예수님께서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신 장면을 읽는 견해도 있다. 

     

    27장 35절 말씀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27장 35절 해설

    1)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마태는 십자가형의 잔혹한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못 박는 장면, 고통의 모습은 생략하고 **"못 박은 후에"**라는 표현으로 지나간다. 이는 독자가 이미 십자가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마태가 사건의 사실을 담담하게 증언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십자가형은 로마가 반역자와 노예, 중범죄자에게 집행하던 형벌로, 극심한 고통과 수치를 동반했다. 마태가 이를 길게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사건의 무게를 더 크게 느끼게 한다.
    • 20장 19절에서 예수님이 예고하신 **"십자가에 못 박게 하기 위하여"**가 이 구절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26절, 31절에서 거듭 예고되던 일이 마침내 집행된 것이다.
    • 주어는 '그들', 곧 군병들이다. 유다에서 시작된 '넘겨줌'의 연쇄가 집행자의 손에 이르러 마무리된다.

    2)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로마의 관례상 처형 집행 군병들은 사형수의 소지품을 나눠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병들에게 이 옷은 처형 업무에 따른 부수입이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28절에서 벗겨졌던 옷, 31절에서 다시 입혀진 옷이 여기서 마지막으로 빼앗긴다. 예수님은 옷마저 남김없이 내어 주신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다. 십자가형은 대개 벌거벗긴 채 집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는 극심한 수치를 동반한다.
    • 군병들이 제비를 뽑는 동안 십자가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에게 이 일은 일상적인 업무였고, 눈앞의 사건의 의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가장 거룩한 사건 곁에서 벌어진 가장 무심한 행동이라는 대비가 있다.
    • 요한복음 19장 23-24절은 이 옷이 네 몫으로 나뉘었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를 뽑았다고 자세히 기록한다. 

    ⊙ 요한복음 19장 23-24절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구의 것이 되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이르기를 그들이 내 겉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이루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러한 일을 하고

     

     

    27장 36절 말씀

    거기 앉아 지키더라

     

    27장 36절 해설

    1) "거기 앉아"
    '앉아'라는 동작은 군병들의 태도를 보여 준다.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 계시는데, 그 아래에서는 군병들이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이들에게 십자가 처형은 반복되는 일상 업무였고, 눈앞의 사건이 지닌 의미를 알지 못했다. 십자가형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었으므로, 군병들이 앉아 기다리는 모습은 당시 처형 현장의 통상적인 광경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 무심한 모습과 십자가 위의 고난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2) "지키더라"
    '지키다(테레오, τηρέω)'는 감시하고 경계하다는 뜻이다. 군병들이 지킨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처형이 끝날 때까지 질서를 유지하고, 사형수가 도망하거나 누군가 구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군병들의 임무였다.
    • 제자들이 모두 도망한 상황(26:56)에서도 예수님은 철저히 감시받으셨다. 구출될 가능성은 없었고, 이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이 길을 받아들이셨음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 또한 27장 62-66절에서는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이 등장하는데, 같은 계열의 단어가 쓰인다. 십자가에서 무덤까지 '지킴'의 주제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27장 37절 말씀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27장 37절 해설

    1) "그 머리 위에"
    죄패는 십자가 위쪽, 곧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붙었다. 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위치였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로마의 관례상 처형당하는 죄수의 죄목을 적은 패를 앞세워 가거나 십자가에 붙여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했다.
    • 왕관을 쓰는 자리인 머리 위에 '왕'이라는 글이 붙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29절에서 가시관을 씌우며 조롱했던 왕 흉내가 십자가 위에서 공식 문구로 다시 나타난다.

    2)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죄패의 내용은 **'유대인의 왕 예수'**이다. 마태복음에서 이 호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핵심 주제이다.

    • 2장 2절에서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 27장 11절에서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했다.
    • 27장 29절에서 군병들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며 조롱했다.
    • 이제 십자가 위의 공식 죄목으로 이 호칭이 붙는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같은 호칭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 마태복음의 수미상관적 구조를 보여 준다. 또한 이 호칭이 이방인의 입과 손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점도 앞서 본 대로 눈여겨볼 부분이다.

     

    3) "쓴 죄패를 붙였더라"
    죄패는 처형의 이유를 밝히는 문구였다. 그런데 마태가 기록한 죄목에는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 오직 정체성에 대한 선언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 죄패는 로마 법정의 관점에서 정치적 반역죄를 뜻한다. 유대 지도자들은 신성모독으로 정죄했으나(26:65), 로마 앞에서는 왕을 자처한 반역자로 고발했고(27:11), 그 결과가 죄패에 반영되었다.
    • 마가복음 15장 26절은 "유대인의 왕", 누가복음 23장 38절은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요한복음 19장 19절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으로 기록한다. 네 복음서의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은 '유대인의 왕'**으로 일치한다. 이 차이는 죄패가 여러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나, 요한복음 19장 20절의 기록에 근거한 추론이므로 확정하기는 어렵다.

    ⊙ 요한복음 19장 20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깝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이 죄패를 읽는데 이는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7장 38절 말씀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7장 38절 해설

    1) "이 때에"
    죄패가 붙고 군병들이 지키고 앉은 그 시점에 두 사람이 함께 처형되었음을 보여 준다. 처형은 여러 죄수를 한꺼번에 집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 두 사람은 같은 날 예정된 사형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본문은 이들이 언제 도착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2)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강도(레스테스, ληστής)'는 단순한 도둑이라기보다 약탈과 폭력을 일삼는 자, 혹은 무장 반란에 가담한 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이들의 구체적인 죄목은 마태가 밝히지 않는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16절의 바라바도 요한복음 18장 40절에서 같은 단어로 불린다. 바라바가 달렸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서시고, 그 곁에 같은 부류의 죄수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다. 다만 두 강도가 바라바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근거는 본문에 없다.
    •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죄인들과 함께 달리신 모습이다. 이사야 53장 12절의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와 연결해 묵상하는 이들이 많다. 
    • 누가복음 22장 37절에서 예수님은 이 이사야 본문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신 바 있다. 마태 본문이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장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이사야 53장 12절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졌고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음이라

    ⊙ 누가복음 22장 3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헤아림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과연 내에 관한 일은 이루어 가나이다

     

    3)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예수님은 두 강도의 가운데 달리셨다. 이 배치에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마태복음 20장 20-23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라에서 한 아들은 우편에, 한 아들은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 일이 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시며 자신이 마실 잔을 언급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는 제자들이 아니라 두 강도가 있다. 영광의 자리를 구하던 요청과 십자가의 현실 사이의 대조가 선명하다. 이는 마태 본문 안에서 같은 표현(우편, 좌편)이 반복되어 확인되는 연결이다.
    • 죄패에 왕이라 적힌 분이 죄수들 사이 한가운데 계신 모습은, 군병들의 의도와 달리 왕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다만 이는 묵상 차원의 해석이다.
    • 마태는 이 두 사람의 이후 행적을 44절에서 조롱에 가담한 모습으로만 짧게 기록한다.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는 한 강도가 회개하는 장면이 따로 있으나, 이는 누가복음에만 있는 기록이다.

     

    27장 39절 말씀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27장 39절 해설

    1) "지나가는 자들은"
    십자가가 세워진 곳은 성에서 가까웠고(요 19:20), 유월절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은 특별히 이 일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우연히 그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슨 일로 처형되시는지 깊이 알지 못한 채 죄패의 글귀와 눈앞의 광경만 보고 반응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본문은 이들의 신원을 밝히지 않는다.
    • 군병들이 무심하게 앉아 지켰다면(36절), 지나가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입을 열어 모욕한다. 십자가 주변에서 무관심과 조롱이 겹쳐지는 모습이다.
    • 가장 평범한 사람들조차 조롱에 가담한다는 점에서,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죄가 특정 집단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자기 머리를 흔들며"
    머리를 흔드는 동작은 경멸과 비웃음을 나타내는 몸짓이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고난 받는 의인을 향한 조롱으로 등장한다.

    • 시편 22편 7절은 **"나를 보는 자들이 다 나를 비웃고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라고 노래한다. 마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동작이 그대로 나타나 이 장면이 시편 22편의 고난 받는 의인의 모습과 겹쳐진다. 앞서 35절에서 옷을 나누는 장면이 시편 22편 18절과 이어진 것과 함께, 마태가 십자가 장면 전체를 시편 22편의 틀 안에서 보게 하는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 예레미야애가 2장 15절에도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무너진 예루살렘을 조롱하는 장면이 있다. 이 역시 참고 수준의 연결이다.

    ⊙ 예레미야애가 2장 15절

    무릇 길로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손뼉을 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으며 머리를 흔들며 이르기를 온전한 아름다움이라, 온 세계의 기뻐하는 바라 칭하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3) "예수를 모욕하여"
    '모욕하다(블라스페메오, βλασφημέω)'는 비방하다, 욕하다는 뜻으로, 흔히 신성모독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26장 65절에서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제 참된 모독은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 쪽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역설이 있다. 이는 마태 본문 안에서 같은 단어가 반복되어 드러나는 대비이다.
    • 이 모욕은 말로 그치지 않고 몸짓과 말이 함께 나타나는 공개적인 조롱이다. 40절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이어진다.
    • 예수님은 이 모든 모욕 앞에서도 침묵을 지키신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의 **"욕을 당하시되 맞대응하여 욕하지 아니하시고"**가 십자가 위에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27장 40절 말씀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27장 40절 해설

    1)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이 조롱은 재판 때 나온 거짓 증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26장 61절에서 두 증인이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증언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요한복음 2장 19-21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고, 이는 자기 몸을 가리키는 말씀이었다. 마태 본문은 이 설명을 직접 담고 있지 않으므로, 요한복음의 보충 기록으로 참고하는 것이 적절하다.
    • 지나가는 자들은 이 말을 허황된 큰소리로 여기고 조롱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일으키심이라는 주제는 마태복음에서 부활의 예고(16:21, 20:19)와 이어진다. 조롱하는 사람들은 부활을 암시하는 말을 비웃음의 소재로 삼았지만, 그 말은 결국 이루어지게 된다.
    • 이 말이 재판 때의 왜곡된 증언에서 퍼졌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거짓 증언이 소문이 되어 십자가 곁의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이다. 다만 지나가는 자들이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 '자여'라는 호칭에는 비꼬는 어조가 담겨 있다. 큰일을 한다던 사람이 지금은 꼼짝 못 하고 달려 있다는 비웃음이다.

    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문구는 시험의 말이다. 4장 3절과 6절에서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며 예수님을 시험했던 표현과 거의 같은 형식이다. 광야에서 돌을 떡이 되게 하라, 뛰어내리라고 했던 유혹이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다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결은 마태 본문 안에서 같은 표현이 반복되어 확인되는 것이다.

    또한 이 조롱은 26장 63-64절에서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를 물었던 질문과도 이어진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십자가 위에서도 계속 도전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3)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조롱하는 자들은 능력이 있다면 스스로를 구하라고 요구한다. 여기에는 깊은 역설이 있다.

    •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고난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신다. 16장 21-23절에서 베드로가 십자가의 길을 막으려 하자 예수님이 단호히 물리치신 일과 같은 맥락이다.
    • 26장 53절에서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청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내려올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내려오지 않기로 택하신 것이다.
    • 20장 28절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러 왔다고 말한다.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심이 곧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 되는 역설이다. 이 점은 42절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는 조롱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27장 41절 말씀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27장 41절 해설

    1) "그와 같이"
    이 표현은 앞서 지나가는 자들이 한 조롱과 같은 방식으로 지도자들도 조롱했음을 보여 준다. 지나가는 자들의 조롱(39-40절)과 지도자들의 조롱(41-43절)은 내용이 서로 겹치는 구조이다. 둘 다 **"자기를 구원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과 종교 권력자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십자가 앞에서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인간의 죄가 드러남을 알 수 있다.

     

    2)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에 가담한 사람들은 공회를 구성하던 세 집단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대제사장은 성전과 제사를 책임지던 자들이고,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자들이며, 장로는 백성의 대표로 공회에 참여하던 자들이다. 곧 이스라엘의 종교와 율법과 대표성을 맡은 지도층 전체가 한자리에서 조롱하고 있다.
    • 1절에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다. 이들은 새벽의 의논에서 시작하여 십자가 아래의 조롱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1절의 의논이 십자가 곁에서의 조롱으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 이들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고발자였고(12절), 군중을 설득한 자였으며(20절), 이제는 십자가 앞의 구경꾼이자 조롱자로 서 있다. 일을 이룬 뒤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직접 확인하려는 모습이다. 다만 본문은 이들이 현장에 있었던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 성전과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앞에서 가장 앞서 조롱한다는 점이 비극적이다. 이들은 유월절 절기에 성전을 떠나 처형장에 와 있었다는 점에서도 본질을 놓친 모습이 드러난다.

    3) "희롱하여 이르되"
    '희롱하다(엠파이조, ἐμπαίζω)'는 29절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할 때 쓰인 것과 같은 단어이다. 곧 이방인 군병들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같은 동사로 묘사된다. 마태는 이 반복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같은 죄에 연루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단어는 20장 19절에서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당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에도 쓰였다. 예고 속에는 이방인만 언급되었으나, 실제로는 지도자들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27장 42절 말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27장 42절 해설

    1)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남을 구원하셨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는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들(9:18-26, 11:5)을 이들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예수님의 이적을 직접 목격하거나 전해 들으면서도 믿지 않았던 이들이, 이제는 그 사실을 조롱의 재료로 삼는다. 12장 24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귀신의 왕의 힘이라 돌린 일과 같은 완악함이다.
    • '구원하다(소조, σῴζω)'는 병을 고치다, 위험에서 건지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영적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지도자들은 육체적 치유와 구조의 의미로 말했겠지만, 마태복음에서 이 동사는 죄에서 구원하심과도 연결된다(1:21).
    • 적대자들의 입에서 예수님이 남을 구원하셨다는 증언이 나온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2)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 문장은 조롱이지만 신학적으로 가장 깊은 진실을 담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지도자들은 능력이 없어서 못 내려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26장 53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청하실 수 있음에도 내려오지 않으신다.
    •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남을 구원하실 수 있다. 20장 28절의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 하심"**이 바로 이 역설을 설명한다.
    • 지도자들은 **"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기로 택하신 것"**이다. 같은 문장이 조롱하는 사람에게는 무능의 증거로, 믿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증거로 읽힌다.

    3)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른다. 앞서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른 것(27:11, 29, 37)과 비교하면 호칭이 다르다.

    • **'유대인의 왕'**은 이방인들이 외부자의 시각에서 쓰는 호칭이고, **'이스라엘의 왕'**은 언약 백성이 내부에서 쓰는 호칭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이 담긴 이 칭호를 조롱의 소재로 쓴다.
    •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참된 왕이 눈앞에 계신데, 그 사실을 비꼬는 말로만 입에 올린다. 사실을 말하면서도 믿지 않는 모습이다.
    • 이는 2장 2-4절에서 헤롯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듣고도 찾아가지 않았던 장면과도 이어지는 구조이다.

    4)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 요구는 40절의 **"십자가에서 내려오라"**와 같은 내용이지만, 여기에는 조건부 믿음이 덧붙는다.

    • 지도자들은 표적을 보면 믿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믿지 않았다. 12장 38-39절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했을 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곧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심을 말씀하셨다. 이들이 구한 표적은 십자가에서 내려옴이지만, 하나님이 주실 표적은 무덤에서 일어나심이다.
    •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으나(28장), 이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군병들에게 돈을 주어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28:11-15). 곧 표적이 없어서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문제였음이 드러난다.
    •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요구한 표적은 구원의 길을 막는 것이었다.

     

     

    27장 43절 말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할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27장 43절 해설

    1)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신뢰해 온 분임을 인정한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조롱의 도구로 쓰인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예수님은 평생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신뢰 속에 사셨다. 광야 시험(4:1-11)에서도, 겟세마네(26:39)에서도 그 신뢰는 변하지 않았다. 지도자들의 말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삶을 정확히 요약하고 있다.
    • 시편 22편 8절은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였으니 구원하실 걸"**이라는 의인을 향한 조롱을 기록한다. 마태는 이 시편을 직접 인용한다고 밝히지는 않지만, 표현이 거의 겹쳐서 십자가 장면이 시편 22편의 고난받는 의인의 모습과 이어짐을 보여 준다. 앞서 35절(옷 나눔), 39절(머리를 흔듦)에 이어 세 번째로 나타나는 시편 22편의 반향이다.
    • 지도자들은 신뢰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했다. 고난 속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는 더 깊은 믿음은 알지 못했다.

    ⊙ 시편 22편 8절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였으니 구원하실지 보라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시리라 하나이다

     

    2)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할지라"
    이 말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는 논리가 담겨 있다.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 하나님의 거절의 증거라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 조롱은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이나 외면으로만 해석하는 시각을 보여 준다. 신명기 21장 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이들의 판단 배경에 있었을 수 있다. 다만 본문이 이를 직접 밝히지는 않는다..
    •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구원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시는 길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죽음을 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로 이끄시는 것이었다. 이는 사흘 뒤 부활(28장)에서 드러난다.
    •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면이라는 조건 자체가 역설적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원하셨기에, 곧 구속의 계획을 이루시려고 아들을 십자가에 두셨다. 이는 묵상 차원의 해석이다.

    3)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다는 점을 다시 꺼낸다. 이는 26장 63-65절의 공회에서 정죄의 핵심 근거가 된 사건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40절에서 지나가는 자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며 조롱했고, 이제 지도자들도 같은 '하나님의 아들' 주제로 조롱한다. 십자가 현장의 모든 조롱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 이 조롱은 광야에서 마귀가 던진 시험(4:3, 6)과 같은 구조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면 고난을 피하는 능력을 보이라는 요구이다. 마태는 예수님이 시험에서 이기신 길을 십자가에서도 이어 가신다고 보여 준다.
    •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알려진다(16:16-17). 조롱하는 이들에게는 그 눈이 열리지 않았다. 반면 54절에서 백부장과 군병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이적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다. 조롱의 외침이 고백으로 뒤집히는 구조이다.

     

    27장 44절 말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27장 44절 해설

    1)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38절에서 예수님의 좌우에 달린 두 강도가 다시 등장한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형벌을 받고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다. 같은 처지의 고난 속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조롱에 가담한다. 죽음을 앞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완악함이 드러난다.
    • '함께 못 박힌'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이들과 같은 자리에 계심을 다시 강조한다.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이 이사야 53장 12절의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와 겹쳐 묵상된다. 이는 참고 수준의 연결이다.
    • 마태는 두 강도를 한 덩어리로 묶어 기록하며, 이들의 개별적인 반응은 구분하지 않는다.

    2) "이와 같이 욕하더라"
    '욕하다(오네이디조, ὀνειδίζω)'는 비난하고 모욕하며 수치를 주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와 같이'는 앞선 조롱과 같은 내용으로 욕했음을 보여 준다. 구체적인 말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40-43절의 "자기를 구원하라"는 흐름과 비슷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본문이 그 내용을 밝히지는 않는다.
    • 시편 22편, 69편에서 고난 받는 의인이 원수들의 비방과 수치를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시편 69편 9절의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와 연결해 묵상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참고 수준이다.
    •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는 한 강도는 욕하고 다른 강도는 회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는 두 강도 모두 욕했다고만 기록한다. 두 기록의 관계는 처음에는 둘 다 욕하다가 한 사람이 변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나, 확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누가복음의 보충 기록이므로 마태 본문 해석에는 참고 수준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

    3) 십자가 곁의 조롱 구조 (39-44절)
    마태는 조롱하는 사람들을 점점 더 가까운 자리의 사람들로 이어 간다.

    • 지나가는 자들(39-40절): 우연히 지나던 일반 사람들
    •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41-43절): 종교 지도층
    • 함께 달린 강도들(44절): 같은 십자가형을 받던 죄수들

    앞서 군병들의 조롱(27-31절)까지 포함하면, 이방인과 유대인, 지도자와 평민, 자유인과 죄수가 모두 조롱에 가담한 셈이다. 예수님을 변호하거나 위로하는 사람은 이 장면에 한 사람도 없다. 이 철저한 고립이 십자가의 외로움과 무게를 더한다.

     

     

    5. 예수의 죽으심과 그에 따른 이적들 (45-56절)

     

    27장 45절 말씀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27장 45절 해설

    1) "제육시로부터"
    유대의 시간 계산법은 해가 뜨는 시각(오늘날 오전 6시경)부터 시간을 세었다. 따라서 **제육시는 정오(낮 12시경)**에 해당한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정오는 하루 중 해가 가장 높고 밝은 시각이다.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어둠이 임했다는 점에서 이 현상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이 강조된다.
    • 마가복음 15장 25절은 예수님이 제삼시(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기록한다. 이를 따르면 예수님은 약 세 시간 동안 조롱 속에 달려 계셨고, 그 뒤에 어둠이 임한 것이다. 한편 요한복음 19장 14절은 빌라도의 재판이 제 육 시쯤이었다고 기록하여, 복음서 간 시간 표기의 차이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2)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어둠(스코토스, σκότος)'이 온 땅을 덮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온 땅'이 전 세계를 뜻하는지 유대 지방 전체를 뜻하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헬라어 '게(γῆ)'는 두 의미로 모두 쓰일 수 있다.
    • 이 어둠의 원인을 마태는 설명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23장 45절은 **"해가 빛을 잃었다"**고 기록하는데, 유월절은 보름달 무렵이어서 일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 자주 지적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초자연적 표징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다. 
    • 구약에서 어둠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자주 등장한다. 출애굽기 10장 21-23절의 애굽에 임한 흑암 재앙, 아모스 8장 9절의 "대낮에 해가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등이 있다. 마태가 이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으나, 독자들은 심판과 하나님의 임재가 겹치는 사건임을 떠올렸을 수 있다.
    • 마태복음 24장 29절에서 예수님은 환난 후에 해가 어두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어둠을 하나님의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3)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는 오후 3시경이다. 어둠은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약 세 시간 이어졌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 시간은 지속적이었다. 순간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 시간 동안 이어진 어둠이었으므로, 십자가 곁의 사람들 모두가 이 변화를 분명히 경험했을 것이다. 조롱하던 목소리가 이 어둠 속에서 잦아들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본문은 이를 밝히지 않는다.
    • 어둠이 끝나는 시점(제구시)은 다음 절(46절)에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는 때와 이어진다.

     

    27장 46절 말씀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27장 46절 해설

    1) "제구시쯤에"
    오후 3시경으로, 45절의 세 시간 동안의 어둠이 끝나 가는 시점이다. 조롱의 소리가 가득했던 십자가 현장에서, 예수님은 조롱에는 단 한 마디도 응하지 않으셨다가 어둠 속에서 비로소 입을 여신다. 이사야 53장 7절의 침묵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적으로 터져 나온 말씀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더욱 크다.

     

    2)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크게 소리 질러(아네보에센 포네 메갈레, ἀνεβόησεν φωνῇ μεγάλῃ)'는 힘을 다해 외치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십자가형으로 기력이 소진된 상태에서도 큰 소리로 외치셨다는 점에서, 이 말씀이 절박하고 의도적인 부르짖음임을 알 수 있다.
    • 조용히 중얼거린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공개적인 기도이자 부르짖음이다. 같은 표현이 50절에서 숨을 거두실 때의 큰 소리로 다시 나타나 죽음 직전의 두 외침이 수미상관을 이룬다.

    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은 시편 22편 1절의 첫 구절을 옮긴 것이다. 마태는 아람어 발음 그대로 기록하고 곧바로 뜻을 풀어 준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시편 22편 1절

    내 하나님,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와 상관하지 아니하옵시나이까

    • 시편 22편 1절의 원문은 히브리어('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인데, 예수님이 사용하신 형태는 아람어의 영향을 받은 표현('사박다니')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일상어가 아람어였음을 보여 준다. 마가복음 15장 34절은 '엘로이 엘로이'로 기록하여 두 복음서의 발음 표기에 차이가 있는데, 이는 아람어와 히브리어 형태의 차이로 설명되곤 한다.
    • 시편 22편은 이미 **35절(옷 나눔), 39절(머리를 흔듦), 43절(하나님께 의탁하였으니)**에서 반복해서 반향되었다. 마태는 시편 22편 전체가 이 장면의 배경임을 계속 보여 주었고, 46절에서 예수님 자신의 입으로 그 시편의 첫 구절을 부르짖으신다. 이로써 이 구조가 절정에 이른다.
    • 시편 22편은 버림받은 듯한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찬양의 고백으로 끝나는 시편이다(22:22-31). 예수님이 시편의 첫 구절을 부르짖으셨다는 점을 근거로 시편 전체의 흐름을 염두에 두셨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해석의 영역이다.
    • '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두 번 반복된다. 버림받은 듯한 순간에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시는 신뢰가 담겨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보통 **'아버지'**라 부르셨는데(26:39, 42), 이 부르짖음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쓰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4)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질문은 신학적으로 가장 깊이 논의되어 온 대목이다. 여러 이해가 있다.

    • 실제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죄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분리를 겪으셨다는 이해이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의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말씀과 연결해 설명하곤 한다. 다만 이는 바울 서신의 신학적 해석이므로 마태 본문 해석에는 참고 수준이다.
    • 시편의 탄식 형식을 따라 고난의 극한에서 드린 기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이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기도이다.
    • 두 이해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며, 어느 쪽이든 본문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주지는 않는다. 마태는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다.
    • 분명한 것은 이 부르짖음이 가장 깊은 고난과 고독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도망했고, 사람들은 조롱했으며, 이제는 하늘마저 침묵하는 듯한 순간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신다.

     

    27장 47절 말씀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27장 47절 해설

    1)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이 말은 십자가 곁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가리킨다. 군병들, 지나가던 사람들, 종교 지도자들 중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어떤 이들'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들은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들은 예수님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오해하는 모습이 역설적이다.
    • 아람어를 쓰는 지역이었으므로 말뜻을 모르는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오해가 진짜 착각인지, 일부러 비튼 조롱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뉜다. 본문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

    2)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지만, 발음이 **'엘리야'**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거나, 그렇게 들린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당시 유대 전승에서 엘리야는 곤경에 처한 의인을 도우러 오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견해가 있다. 다만 이 전승이 1세기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는 논의가 있다.
    • 구약 말라기 4장 5절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이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도 엘리야는 메시아 이전에 올 인물로 언급된다(11:14, 17:10-13). 이 사람들의 말에는 엘리야가 와서 구해 주는지 보자는 기대나 조롱이 섞여 있었을 수 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르셨는데,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른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사람들의 손에서 조롱의 소재로 바뀌는 모습이다. 이는 40-43절에서 이어진 '구원해 보라'는 조롱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27장 48절 말씀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라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27장 48절 해설

    1)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그 중의 한 사람'은 47절에서 말한 구경꾼들 가운데 한 명이다.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군병인지 구경꾼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곧 달려가서'라는 표현은 즉각적인 행동을 보여 준다. 마태가 이 행동을 호의로 보았는지 조롱으로 보았는지는 본문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 34절에서는 예수님이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하셨는데,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음료가 주어진다. 두 장면은 십자가 처형의 시작과 끝 무렵에 각각 나타난다.

    2)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해면(스펑고스, σπόγγος)'은 바다 해면으로 만든 스펀지를 말한다. '신 포도주(옥소스, ὄξος)'는 시어진 포도주나 식초 같은 음료로, 로마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마시던 값싼 음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해면에 적셔 건넨 이유는 십자가 위의 입에 직접 닿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갈증을 해소해 주려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볼 수도 있다.
    • 시편 69편 21절은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고 말한다. 마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초(신 포도주)'라는 같은 소재가 나타나므로 시편 69편과 겹쳐 읽는 이들이 많다. 
    • 요한복음 19장 28-29절은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뒤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으로 기록한다. 

    ⊙ 요한복음 19장 28-29절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면을 우슬초 대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십자가에 달린 분의 입에 닿으려면 긴 막대가 필요했으므로 갈대를 사용했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29-30절에서 조롱의 소품이었던 갈대가 이번에는 음료를 건네는 도구로 쓰인다. 같은 단어(칼라모스)가 반복되어 십자가 장면 속의 갈대가 조롱과 물 건넴 두 방향으로 쓰인 점이 눈에 띈다. 다만 마태가 이 대비를 의도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 마가복음 15장 36절은 이 사람이 **"가만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고 말했다고 기록한다. 이를 근거로 이 행동이 호의가 아니라 시간을 끌며 지켜보려는 조롱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보충 기록이므로 참고 수준이다.
    • 이 사람은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삼는 흐름 속에서도 최소한의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의도는 해석의 영역이다.

    4) "마시게 하거늘"
    마태는 이 음료를 예수님이 마셨는지 기록하지 않는다. 34절에서는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고 분명히 기록했던 것과 대조된다. 이 점을 두고 여러 이해가 있다.

    •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고 전한다. 
    • 26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실 그날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과 연결해 읽는 견해도 있다.

     

    27장 49절 말씀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27장 49절 해설

    1)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남은 사람들'은 48절에서 해면을 가지러 달려간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구경꾼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정체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48절의 한 사람은 행동으로, 남은 사람들은 말로 반응한다. 십자가 현장의 반응이 행동과 말로 나뉘어 나타나는 구조이다.
    • 40-43절의 조롱이 **"내려오라, 구원해 보라"**였다면, 여기서는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나 보자"**로 바뀐다. 조롱의 형식은 달라졌으나 내용은 같은 흐름이다.

    2) "가만 두라"
    '가만 두라(아페스, ἄφες)'는 그대로 두라, 내버려 두라는 뜻이다. 이 말에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신 포도주를 건네려는 사람을 말리는 말로 읽을 수 있다. 곧 개입하지 말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는 태도이다.
    • 마가복음 15장 36절에서는 신 포도주를 건넨 사람 자신이 이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마태와 마가의 서술에 차이가 있다. 마태는 이 말을 **'남은 사람들'**의 말로 기록한다. 
    • 이 말은 고난 받는 분 앞에서 구경꾼의 자리에 머무르는 태도를 보여 준다. 돕는 것도, 돕지 않는 것도 아닌 관망이다.

    3)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이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불렀다고 믿거나 그렇게 말하며, 엘리야가 오는지 지켜보자고 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47절에서 본 대로 '엘리'와 '엘리야'의 발음 유사성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르셨으나, 사람들은 엘리야가 구원자로 오는지에만 관심을 둔다.
    • 마태복음 11장 14절, 17장 10-13절에서 엘리야의 역할은 이미 세례 요한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설명된 바 있다. 곧 예수님은 엘리야가 와야 한다는 기대를 이미 다루신 분인데, 구경꾼들은 엘리야를 기다리며 정작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마태 본문 안에서 확인되는 역설적 대비이다.
    • '구원하다(소조)'는 40, 42, 43절에서 반복된 핵심 동사이다. 십자가 곁의 조롱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 눈에 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건져 내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했지만, 실제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27장 50절 말씀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27장 50절 해설

    1) "예수께서 다시"
    '다시'는 46절의 큰 부르짖음에 이어 두 번째로 크게 소리 지르셨음을 보여 준다. 두 외침이 죽음 직전의 수미상관을 이룬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46절에서 예수님은 시편 22편 1절로 부르짖으셨다. 이번에는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마태가 기록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23장 46절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은 **"다 이루었다"**를 기록하는데, 이는 다른 복음서의 보충 기록이므로 마태 본문 해석에는 참고 수준이다.
    • 사람들이 구경하고 조롱하는 동안에도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해 외치신다. 구경꾼들은 엘리야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께 향해 있었다.

    ⊙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지시니라

    ⊙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2) "크게 소리 지르시고"
    '크게 소리 지르다(크라조, κράζω)'는 외치다, 부르짖다는 뜻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십자가형은 서서히 기력이 소진되어 죽음에 이르는 형벌로 알려져 있다. 그런 상태에서 큰 소리를 내셨다는 점은 죽음이 힘이 다해 무력하게 맞이한 결과가 아님을 시사한다. 다만 이는 본문에서 추론한 해석이다.
    •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수 없고 내가 스스로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과 연결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 주신 모습으로 묵상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한 참고 수준의 연결이다.

    3) "영혼이 떠나시니라"
    '떠나시니라(아페켄, ἀφῆκεν)'는 보내다, 놓아 주다는 뜻의 동사로, 직역하면 **"영을 내보내셨다"**에 가깝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마태는 '죽으셨다'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이 동사를 사용한다. 이는 죽음이 수동적으로 당한 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내어 주신 행위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다만 이 단어가 죽음을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으로도 쓰일 수 있어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 마태는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듯(27:35), 죽음의 순간도 담담하게 한 문장으로 기록한다. 그 절제가 오히려 사건의 무게를 전한다.

     

    27장 51절 말씀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27장 51절 해설

    1) "이에 성소 휘장이"
    '이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곧바로 이어진 사건임을 보여 준다. '성소(나오스, ναός)'는 5절에서도 쓰인 성전 본관을 가리키며, '휘장(카타페타스마, καταπέτασμα)'은 성전 안의 휘장을 뜻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성전에는 두 개의 주요 휘장이 있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안쪽 휘장과 성전 입구의 바깥 휘장이다. 마태가 어느 휘장을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으며,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린다. 다만 히브리서 9장 3절, 10장 19-20절이 지성소 앞의 휘장을 이야기하므로 안쪽 휘장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던 곳이었다(레 16장).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분리를 상징했다.
    • 오후 3시경은 성전에서 저녁 제사를 드리던 시각으로 알려져 있어(45절 참조), 이 사건이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에게도 목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이 표현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 **'위로부터 아래까지'**는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찢으셨음을 암시한다. 사람의 손으로는 위에서 아래로 찢기 어려운 높고 두꺼운 휘장이었다. 또한 '찢어져'는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어, 행위자가 하나님이심을 시사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다.
    • **'둘이 되고'**는 완전하게 갈라졌음을 강조한다. 일부가 상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둘로 나뉘었다.
    • 이 사건의 의미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다.
      •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해석이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은 예수님의 피와 휘장 곧 그의 육체를 통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는 신학적 해석으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해이나, 마태가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서신서를 통한 참고 수준이다.
      • 성전 제사 체계의 종결 또는 성전에 대한 심판의 표징으로 보는 해석이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예수님이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셨고, 23장 38절에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과 연결해 읽는 견해가 있다.
      •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을 떠나심을 보여 주는 표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땅이 진동하며"
    '진동하다(세이오, σείω)'는 흔들리다는 뜻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구약에서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 큰 사건과 함께 나타나곤 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출 19:18), 하나님이 일어나 땅을 흔드시는 모습(시 68:8, 사 24:18-20) 등이 있다. 마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개입을 떠올리게 하는 표징이다.
    • 마태복음에서 지진은 중요한 전환점마다 등장한다. 28장 2절에서 부활의 아침에도 큰 지진이 일어난다. 십자가와 부활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사건임을 보여 주는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태 본문 안에서 확인되는 연결이다.
    • 유대 묵시 문학적 배경에서 지진과 어둠은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표징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 점은 학자들이 자주 지적하는 해석이다.

    4) "바위가 터지고"
    '터지다(스키조, σχίζω)'는 갈라지다, 찢어지다는 뜻으로, 휘장이 '찢어진' 것과 같은 동사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휘장도 찢어지고 바위도 갈라진다. 사람이 만든 성전의 휘장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바위가 같은 동사로 묘사되어, 사건이 인공물과 자연 모두에 미친 하나님의 개입임을 드러낸다.
    • 바위가 터졌다는 것은 52절의 무덤이 열리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된다.

     

     

    27장 52절 말씀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27장 52절 해설

    1) "무덤들이 열리며"
    51절에서 바위가 터진 일과 이어지는 사건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당시 유대 지역의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 무덤이 많았고, 입구는 돌로 막아 두었다. 지진과 바위의 갈라짐으로 무덤 입구가 열렸다고 이해할 수 있다.
    • 무덤이 열린 것은 죽음의 권세가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표징으로 읽는 견해가 많다. 
    • 51절의 휘장, 지진, 바위에 이어 무덤까지 열리는 흐름은 하나님의 개입이 성전에서 땅으로, 땅에서 죽은 자들의 자리로 확장되는 구조로 볼 수 있다.

    2)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자던(코이마오, κοιμάομαι)'은 잠자다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자주 쓰인다(요 11:11, 살전 4:13-14 참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성도(하기오이, ἅγιοι)'**는 거룩한 자들을 뜻한다. 이들이 구약 시대의 경건한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그 밖의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으며, 구체적인 인물을 단정할 수 없다.
    • **'몸'**이라는 표현은 이것이 영적인 환상이 아니라 몸의 일어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 **'많이'**는 한두 명이 아니라 상당수였음을 나타내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 '잠자던 자'가 일어난다는 표현은 부활의 언어와 연결된다. 이사야 26장 19절, 다니엘 12장 2절에는 죽은 자들이 깨어 일어난다는 구약의 소망이 나온다. 마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으나, 독자는 종말의 부활 소망이 앞당겨 나타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 이사야 26장 19절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이 깨어 노래하는도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 다니엘 12장 2절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고 수치를 당하여 한없이 부끄러움을 받을 자도 있을 것이며

     

    3) "일어나되"
    이 구절의 문장은 53절까지 이어진다. 일어난 시점이 언제인지는 해석이 갈린다.

    • 53절은 "그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기록한다. 곧 무덤은 예수님의 죽음 때 열렸으나, 성도들이 나와 나타난 것은 부활 후로 읽는 견해가 많다.
    • 이 구조는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이고, 그 뒤에 성도들이 따라 일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곤 한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의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가운데서 첫 열매"**와 연결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 바울 서신에 근거한 참고 수준의 연결이다.
    • 이 사건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건인지, 묵시적 상징 언어인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 이 일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도 논의의 대상이다. 이 구절은 어느 한 입장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본문이다.

     

    27장 53절 말씀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27장 53절 해설

    1) "예수의 부활 후에"
    이 구절의 핵심은 시점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52절에서 무덤이 열린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 때였지만,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온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기록된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먼저임을 분명히 하는 표현이다.
    •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의 **"첫 열매"**와 연결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이들의 부활에 앞서는 시작임을 보여 주는 구조로 읽는 견해가 많다. 
    • 다만 무덤이 열린 뒤 부활 때까지 성도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이 문장 구조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끊어 읽는 위치를 비롯한 여러 견해가 있다.

    2)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52절의 **'자던 성도들'**이 이제 무덤에서 나오는 모습이 기록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나와서'는 죽음의 자리를 벗어남을 나타낸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선언이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 이들이 어떤 상태로 일어났는지, 곧 예수님의 부활처럼 영원한 부활의 몸이었는지, 다시 죽을 소생이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이 역시 해석이 갈리는 부분이다.
    • 이들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3) "거룩한 성에 들어가"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태복음 4장 5절에서도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으로 불렸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넘긴 도시가 **여전히 '거룩한 성'**으로 불린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마태는 이 도시의 언약적 위치를 인정하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난 일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 죽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도시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소망을 암시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4)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보이니라(에페파니산, ἐνεφανίσθησαν)'는 나타나다, 드러나다는 뜻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 일이 많은 사람에게 목격되었다는 표현은 사건의 공개성을 강조한다. 다만 이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 이 사건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건인지, 종말의 부활을 앞당겨 보여 주는 묵시적 표현인지를 두고 오랜 논쟁이 있다. 두 견해 모두 이 본문이 부활의 의미를 전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한쪽으로 단정하기보다 본문이 증언하는 방향을 살피는 것이 좋다.
    • 마태 외의 복음서에는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논의의 대상이다.

     

    27장 54절 말씀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27장 54절 해설

    1)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백부장(켄튀리온, κεντυρίων)'은 로마군에서 약 100명을 지휘하던 장교이다. 

    • 36절에서 **"거기 앉아 지키더라"**고 했던 **'지키다(테레오)'**와 같은 동사가 쓰였다. 무심하게 앉아 지키던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는 고백하는 사람들로 바뀐다. 
    • 이들은 예수님을 처형한 집행자들이었다. 옷을 제비 뽑고 조롱하던 이들이 가장 먼저 고백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끝까지 조롱한 것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 마태복음에서 이방인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구도는 반복된다. 동방박사(2:1-12), 가나안 여인(15:28), 로마 백부장(8:10), 빌라도의 아내(27:19)가 그 예이다. 54절은 이 흐름의 절정으로 볼 수 있다.

    2)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이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들을 보고 나왔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그 일어난 일들'은 45절의 어둠, 50절의 외침과 죽음, 51-53절의 지진과 바위 갈라짐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군병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모습 전체를 가까이서 지켜본 증인이었다.
    • 마가복음 15장 39절은 백부장이 예수님이 이같이 숨지시는 것을 보고 고백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마가복음의 보충 기록으로, 마태가 지진과 이적을, 마가가 죽으시는 모습을 강조한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 마가복음 15장 39절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같이 소리 지르시고 숨지심을 보고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3) "심히 두려워하여"
    '심히 두려워하여(에포베테산 스포드라, ἐφοβήθησαν σφόδρα)'는 크게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반응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이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라기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경외에 가깝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큰 일 앞에서 사람이 두려워하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 마태복음에서 이 부사 '심히(스포드라)'가 쓰인 두려움은 변화산(17:6)에서 제자들이 엎드려 심히 두려워한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의 반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두려움일 가능성도 있으나, 본문은 두려움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

    4)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 고백은 마태복음 전체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 40절에서 지나가는 자들이, 43절에서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조롱의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이방인 군병들이 같은 호칭을 고백으로 선포한다. 조롱의 말이 고백의 말로 뒤집히는 구조이다.
    • '진실로(알레토스, ἀληθῶς)'는 참으로, 정말로라는 뜻으로, 확신에 찬 선언의 어조이다. 26장 73절에서 **"진실로 너도 그 도당이다"**라고 말하던 사람들과 같은 부사가 쓰였다.
    •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는 **과거형(에인)**으로 쓰여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어조를 띤다. 이 고백이 로마인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였는지, 곧 '신의 아들'이라는 이방적 표현이었는지 유대적 의미의 메시아적 칭호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다. 다만 마태가 독자에게 이 고백을 참된 고백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세례 때(3:17)와 변화산(17:5)에서 하늘의 음성으로 선포되었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4:3, 6)과 대제사장의 질문(26:63)에서도 중심이 되었다. 십자가의 순간에 이방인의 입을 통해 이 정체성이 고백된다는 점이 마태의 수미상관적 구조를 이룬다.

     

    27장 55절 말씀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27장 55절 해설

    1)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때부터 함께해 온 사람들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누가복음 8장 2-3절은 여러 여인이 자기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이는 누가복음의 보충 기록이지만, 이 여인들이 일행의 사역을 뒷받침하던 사람들이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이들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따라온 사람들이다. 유월절 순례 길에 함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본문은 그 구체적인 경위를 밝히지 않는다.

    ⊙ 누가복음 8장 2-3절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몇 여자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니 이 여자들은 자기 재물로 그들을 섬기더라

     

    2) "예수를 섬기며"
    '섬기다(디아코네오, διακονέω)'는 봉사하고 시중드는 일을 뜻한다. 이 동사는 마태복음에서 의미 있게 쓰인다.

    • 20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어근의 동사가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여인들의 모습에 모두 쓰인 점이 눈에 띈다.
    • 이 동사는 4장 11절의 천사들이 예수님께 수종 든 장면, 8장 15절의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나 수종든 장면에서도 쓰였다. 곧 제자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로 볼 수 있다.
    • 제자들은 모두 도망했으나(26:56), 섬기던 이들은 끝까지 곁에 남았다는 대비가 있다.

    3)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여인들은 십자가 가까이가 아니라 멀리서 지켜보았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멀리 서 있었다는 점은 두려움과 위험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본문은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로마의 처형 현장에서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 시편 38편 11절에는 친구와 이웃이 멀리 서 있다는 고난 받는 자의 탄식이 있다. 마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으나 고난받는 의인의 외로움과 겹쳐 읽는 이들이 있다. 
    • 그러나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 것은 분명하다. 제자들은 도망했고, 군중은 조롱했지만, 이 여인들은 죽음의 순간을 목격한 증인이 되었다.
    • 마태복음에서 **'바라보다(테오레오, θεωρέω)'**는 지속적으로 지켜본다는 뉘앙스를 띤다. 이들은 잠깐 구경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이다.

     

     

    27장 56절 말씀

    그 중에는 막달라 마라이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27장 56절 해설

    1)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서편에 있던 마을로, 마리아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누가복음 8장 2절은 그녀가 일곱 귀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
    • 마태복음에서 그녀는 십자가(27:56), 장사(27:61), 빈 무덤(28:1) 세 장면에 모두 등장한다. 곧 죽음, 장사, 부활의 현장을 모두 목격한 증인이다.

    2)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이 마리아는 아들들의 이름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27장 61절과 28장 1절에서는 **"다른 마리아"**로 불리며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나온다. 같은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마가복음 15장 40절은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기록한다. 이 야고보와 요셉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정하기는 어렵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서 예수님의 형제로 언급된 야고보, 요셉과 같은 인물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리며, 본문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 이름 대신 아들들을 통해 소개된다는 점은, 초대 교회 공동체가 이 가족을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추론의 영역이다.

    3)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세베대의 아들들'은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다(4:21).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마태는 이 여인의 이름을 적지 않는다. 마가복음 15장 40절은 **'살로메'**라는 이름을 기록하는데,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확정할 수는 없다.
    • 20장 20-21절에서 이 어머니는 아들들이 예수님의 나라에서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 사람이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다. 이제 그녀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다. 
    • 38절에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달린 이들은 두 강도였다. 그 어머니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도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 그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이 자리에 없었고(26:56), 어머니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대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6. 예수님의 장사 (57-61절)

     

    27장 57절 말씀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27장 57절 해설

    1) "저물었을 때에"
    '저물었을 때'는 날이 저물어 갈 무렵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오후 3시경 숨을 거두셨으므로, 그 뒤 몇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유대의 하루는 해가 질 때 시작되었고, 이튿날은 안식일이었다. 따라서 해가 지기 전에 장사를 마쳐야 하는 시간의 압박이 있었다.
    • 신명기 21장 23절은 나무에 달린 시체를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라고 규정한다. 앞서 본 구절이며, 이 규정이 장사를 서두른 배경이 되었을 수 있다. 
    • 제자들은 모두 도망했고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순간에 한 사람이 나선다.

    2)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이 인물은 마태가 처음 소개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아리마대'**는 유대 지방의 한 마을이다. 누가복음 23장 51절은 유대인의 동네라고 설명한다. 정확한 위치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으며 확정하기 어렵다.
    • **'부자'**라는 점은 마태만이 기록한 특징이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 이사야 53장 9절은 고난 받는 종이 **"그의 무덤은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한다. 마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으나, '부자'라는 단어를 굳이 적은 점을 이 구절과 연결해 읽는 견해가 많다. 
      • 마태복음 19장 23-24절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부자 요셉이 제자로 등장하여, 어려운 일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19:26)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 마가복음 15장 43절과 누가복음 23장 50-51절은 요셉이 존경받는 공회원이었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이는 다른 복음서의 보충 기록이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을 정죄한 공회의 구성원이었으나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 된다. 마태 본문만으로는 이 점을 알 수 없다.

    ⊙ 마가복음 15장 43절

    아리마대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3)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마태는 요셉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제자(마데튜오, ἐμαθήτευσεν)'는 이 구절에서 동사 형태로 쓰여 **"제자가 되었다,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에 가깝다. 요셉이 이미 그 길을 걸은 사람임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 요한복음 19장 38절은 요셉이 유대인이 두려워 몰래 제자가 된 사람이라고 기록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보충 기록이다. 공개적으로 따르지 못하던 사람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 용기를 낸 것이 된다.
    • '그도'라는 표현은 갈릴리에서 따라온 여인들처럼 요셉도 제자의 대열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열두 제자가 도망한 자리에서 뜻밖의 사람들이 제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 요한복음 19장 38절

    이 일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27장 58절 말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27장 58절 해설

    1) "빌라도에게 가서"
    요셉은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 총독을 직접 찾아간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마가복음 15장 43절은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이는 마가복음의 보충 기록으로, 이 행동이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음을 보여 준다.
    •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시신이 방치되거나 공동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죄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자신도 그와 연루된 사람으로 드러나는 위험을 안은 일이었다. 
    • 요한복음 19장 38절은 요셉이 유대인이 두려워 제자임을 숨기던 사람이라고 전한다. 이 기록에 비추어 보면, 요셉은 숨겨 왔던 신앙을 가장 위험한 순간에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 된다. 
    • 제자들은 도망했고, 가족과 가까운 이들도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시신을 수습하러 나선 사람은 뜻밖에도 공회와 가까운 부자 요셉이었다.

    2)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시체(소마, σῶμα)'는 몸을 뜻하는 단어이다. 마태는 같은 단어를 26장 26절에서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하신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도 사용했다. 또한 59절에서도 **'시체'**로 같은 단어가 쓰인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요셉은 예수님의 명예나 이름이 아니라 몸을 요청한다. 이는 존엄한 장사를 치러 드리려는 마음을 보여 준다.
    • 신명기 21장 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를 당일에 장사하라는 규정은 저주받은 자라 할지라도 시신을 방치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요셉의 요청은 이 규정을 지키는 율법적 신실함과도 맞닿아 있다. 
    • 이 요청은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로 확인되는 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마가복음 15장 44-45절은 빌라도가 예수님이 이미 죽으셨는지 놀라며 백부장에게 확인했다고 기록한다. 

    ⊙ 마가복음 15장 44-45절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으셨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시체를 요셉에게 내주는지라

     

     

    3)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을 허락하고 명령을 내린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시신의 처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명령이 있어야 시신이 요셉에게 넘어갈 수 있었다.
    • 앞서 예수님을 군병들에게 '내주었던' 빌라도(27:26)가, 이제는 **시신을 요셉에게 '내주라'**고 명령한다. 마태 27장에서 반복된 **'넘겨주다'**의 흐름이 이번에는 존엄한 장사를 위한 방향으로 쓰인 점이 눈에 띈다. 
    • 이 허락으로 예수님의 시신은 로마의 공동 처리가 아니라 새 무덤에 안장되는 길이 열린다. 이는 59-60절에서 이어진다.
    • 이사야 53장 9절의 **"그가 죽은 후에는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가 이 장면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묵상하는 이들이 많다.

    ⊙ 이사야 53장 9절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27장 59절 말씀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27장 59절 해설

    1)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가져다가(람바노, λαμβάνω)'는 받아 들다, 취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마태는 이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지만, 요셉이 직접 나서서 시신을 맡았다는 점이 분명하다. 마가복음 15장 46절은 요셉이 시신을 내렸다고 기록한다. 
    • 유대 율법에서 시체에 접촉하면 의식적으로 부정해졌다(민 19:11). 더구나 유월절 기간이었다. 요셉은 공회원이자 부자라는 신분임에도 의식적 부정을 감수하고 시신을 만졌다. 이는 율법의 규정과 당시 상황에 근거한 이해이며, 마태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 요한복음 19장 39절은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가져왔다고 기록한다. 

    ⊙ 마가복음 15장 46절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 요한복음 19장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2) "깨끗한 세마포로"
    '세마포(신돈, σινδών)'는 고운 아마포로 만든 천을 뜻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깨끗한'**이라는 수식어는 마태만이 기록한 표현이다. 이는 정성과 존중을 보여 준다. 값비싼 새 천을 준비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으나, 본문은 구체적인 값이나 품질을 밝히지 않는다.
    • 마가복음 15장 46절은 요셉이 세마포를 사 왔다고 기록한다. 
    • 고대 유대 사회에서 시신을 천으로 감싸는 것은 장례의 기본 절차였다.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적절한 장례 없이 처리되는 일이 흔했으나, 예수님은 정식 장례의 예우를 받으신다. 이는 일반적 관행에 근거한 이해이다.

    ⊙ 마가복음 15장 46절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3) "싸서"
    '싸서(엔에틸릭소, ἐνετύλιξεν)'는 감싸다, 두르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신약에서 이 장면과 병행 구절에서만 쓰이는 드문 단어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이 행동은 마지막 예를 갖추는 돌봄이다. 제자들이 도망하고 가족이 멀리서 지켜볼 뿐이던 때에 한 제자가 마지막 존엄을 지켜 드린다.
    • 시간이 촉박했기에 완전한 장례 준비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난 뒤 다시 무덤에 가려 했던 점(마가복음 16:1, 누가복음 23:55-56 참조)이 이를 뒷받침한다. 
    • 이 세마포는 부활의 아침에 빈 무덤에서 남겨진 증거로 이어진다(요 20:5-7). 

    ⊙ 요한복음 20장 5-7절

    5절 "구푸려 가는 베를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절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베 조각들이 놓여 있고"

    7절 "또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베 조각과 함께 있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있더라"

     

     

    27장 60절 말씀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27장 60절 해설

    1)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이 무덤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 '바위 속에 판' 무덤은 암벽을 파서 만든 동굴 무덤이다. 당시 부유한 사람들이 쓰던 형태로, 상당한 비용이 드는 무덤이었다. 마가복음 15장 46절도 같은 표현을 쓴다.
    • '자기' 무덤이라는 표현은 마태만의 특징이다. 요셉은 자신이 묻힐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린 것이다. 부자가 값비싼 무덤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모습에서 헌신의 크기를 볼 수 있다.
    • '새' 무덤이라는 점은 의미가 크다. 누가복음 23장 53절과 요한복음 19장 41절은 아직 아무도 장사된 적이 없는 무덤이라고 기록한다. 새 무덤이었기에 훗날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이심이 분명해진다. 다른 시신과 섞일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2) "넣어 두고"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 실제로 안치되신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 행동은 예수님이 확실히 돌아가셨다는 증거이다. 부활의 선포는 분명한 죽음과 장사를 전제로 한다.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고전 15:3-4)도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순서를 따른다. 이는 바울 서신의 참고 수준이다.
    • 앞서 예수님은 12장 40절에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고가 무덤 안치로 구체화되는 장면이다.

    3)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굴려서 막는 돌은 당시 부유한 사람의 무덤에 쓰이던 방식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큰 돌'**은 무덤을 안전하게 봉하는 장치이다. 짐승이나 도굴꾼을 막는 역할을 했다. 이 돌은 66절에서 인봉되고, 28장 2절에서 천사가 굴려 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는 마태 본문 안에서 확인되는 흐름이다.
    • 사람이 이 돌을 굴려 놓은 것은 죽음의 봉쇄를 상징한다. 사람의 손으로 닫은 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리는 반전이 뒤따른다. 이는 묵상 차원의 해석이다.
    • 이 돌은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소문(28:13)에 대한 반박의 배경도 된다. 큰 돌과 인봉과 파수꾼이 있었기 때문이다.

    4) "가니"
    요셉은 장사를 마치고 그 자리를 떠난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이 한 마디에는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정적이 있다. 요셉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이제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활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 당시 시간상 안식일이 임박했으므로 서둘러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요한복음 19장 42절의 보충 기록에 근거한 참고 수준이다.

    ⊙ 요한복음 19장 42절

    그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27장 61절 말씀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27장 61절 해설

    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이 두 여인은 56절에서 십자가를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이름이 밝혀진 이들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다른 마리아'**는 56절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태가 같은 이름이 겹치므로 **'다른'**이라는 표현으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 마가복음 15장 47절은 이 여인들이 예수님이 두신 곳을 보았다고 기록한다. 이는 마가복음의 보충 기록이다. 곧 이들은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증인이다.
    • 요셉은 장사를 마치고 떠났고, 제자들은 흩어진 상태였다. 그 자리에 끝까지 남은 사람들은 여인들이었다. 십자가(27:55-56)에서 장사(27:61)로, 그리고 **빈 무덤(28:1)**까지 이어지는 이들의 동행이 마태 본문에서 확인된다.

    ⊙ 마가복음 15장 47절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 둔 곳을 보더라

     

    2) "무덤을 향하여"
    여인들은 무덤 쪽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 자세는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보여 준다.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끝났고, 시신을 위한 준비도 다 하지 못했으나, 무덤 앞을 떠날 수 없었던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본문은 이들의 심정을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추론의 영역이다.
    • 이들은 부활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안식일 후에 무덤을 보러 가는 것(28:1)이 목적이었고, 이는 애도와 돌봄의 마음에서 나온 행동으로 이해된다.
    • 이 장면은 증인의 역할과도 이어진다. 십자가 위의 죽음, 무덤에 놓이는 모습, 이후 빈 무덤을 모두 직접 본 사람들이 되었다. 이는 본문 흐름에 근거한 해석이다.

    3) "앉았더라"
    '앉았더라(카데메노이, καθήμεναι)'는 계속 앉아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이는 잠시 들른 것이 아니라 한동안 머물렀음을 암시한다. 슬픔 속에서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다.
    • 36절에서 군병들이 십자가 곁에 앉아 지켰던 모습과 같은 동사 계열이 쓰인 점이 눈에 띈다. 같은 '앉음'이지만 무심한 감시와 애도의 동행이라는 대조가 있다. 

     

    7.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 (62-66절)

     

     

    27장 62절 말씀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27장 62절 해설

    1)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준비일(파라스큐에, παρασκευή)'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 곧 금요일을 가리킨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따라서 **'준비일 다음 날'은 안식일(토요일)**이다. 앞서 확인한 대로 금요일 저녁에 장사가 마무리되었고,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었다. 마태는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 않고 **'준비일 다음 날'**이라고 돌려 표현한다.
    • 이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준비일'이 등장하는 유일한 곳이다. 마가복음 15장 42절과 요한복음 19장 14, 31, 42절에도 '준비일'이 나오므로, 복음서들이 같은 날의 흐름을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안식일은 일을 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이었다. 출애굽기 20장 8-11절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한다. 지도자들의 행동이 이 규정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마태는 이를 직접 평가하지 않는다.

    2)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조합은 마태복음 27장에서 처음 나타나는 구성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지금까지 수난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이었다(26:3, 57, 27:1, 41). 바리새인들은 수난 기사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다가 여기서 대제사장들과 함께 나타난다.
    • 바리새인들은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과 가장 자주 충돌한 집단이었다(12:14, 23장). 마지막 장면에서 이 집단이 다시 나타나 예수님을 대적한 모든 세력이 하나로 모이는 구도가 완성된다. 이는 마태 본문 흐름에서 확인되는 점이다.
    • 사두개파 성향이 강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평소에 서로 견해가 달랐던 집단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관련해서는 함께 움직인다. 

    3)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지도자들은 다시 빌라도를 찾아간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1-2절에서 이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겼다. 이제는 무덤을 지키기 위해 같은 총독 앞에 다시 선다. 처음과 마지막이 같은 장소, 같은 인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 '모여'는 공식적인 방문을 뜻한다. 안식일에 이방인 총독을 찾아가는 일은 그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움직였다는 점은 이 일이 그만큼 다급했음을 보여 준다.
    • 요한복음 18장 28절에서는 이들이 유월절 정결을 위해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 이중적인 태도와 대조해 볼 수 있다.

    ⊙ 요한복음 18장 28절

    사람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니 이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고자 함이러라

     

     

    27장 63절 말씀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27장 63절 해설

    1) "주여"
    '주여(퀴리에, κύριε)'는 정중한 호칭으로, 여기서는 '각하' 정도의 존칭으로 쓰였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 호칭은 총독에게 예의를 갖춘 표현이다. 이들은 평소 이방인 총독을 낮추어 보았으나, 필요한 일 앞에서는 공손한 태도를 취한다.
    • 마태복음에서 '퀴리에'는 제자들과 믿는 자들이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를 때도 쓰인다(8:2, 25 등). 같은 단어이지만 이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존칭이다.
    • 이들은 예수님을 **'주'**라 부르지 않고 빌라도를 **'주'**라 부른다. 이는 본문에서 확인되는 대비이다.

    2) "저 속이던 자가"
    '속이던 자(플라노스, πλάνος)'는 미혹하는 자, 사기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저 사람'**처럼 멸시하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이다. 같은 어근의 동사 '미혹하다(플라나오)'는 24장에서 거짓 그리스도들이 사람을 미혹한다(24:4-5, 11, 24)고 경고하는 말씀에 쓰였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메시아로 규정한 것이다.
    • **'살아 있을 때에'**라는 표현은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이미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죽음을 확신하는 이들이 동시에 무덤을 두려워하는 모순이 드러난다.

    3)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이 구절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예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12장 40절(요나의 표적), 16장 21절, 17장 23절, 20장 19절에서 사흘째 되는 날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잊은 듯 행동했는데, 오히려 적대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 앞서 40절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는 조롱과 이어진다. 십자가 곁에서는 이를 비웃음거리로 삼았지만, 이제는 실제로 일어날까 불안해한다. 비웃음 뒤에 불안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 마태는 지도자들이 이 말씀을 믿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들은 부활 자체가 아니라,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부활을 조작하는 일을 염려한다(64절).

     

    27장 64절 말씀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27장 64절 해설

    1)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지도자들은 총독의 권한으로 무덤을 지키라는 명령을 청한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굳게(아스팔리조, ἀσφαλίζω)'는 안전하게 하다, 확실히 지키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65-66절에서도 **'굳게 지키라', '굳게 하니라'**로 반복된다. 이 단락의 핵심 단어로, 지도자들이 얼마나 철저한 방비를 원했는지를 보여 준다.
    • 이들은 죽은 사람의 무덤을 경계해 달라고 한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확신하면서도 무덤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모순이 다시 드러난다.
    • 안식일에 이방인 총독을 찾아가 요청하는 것 자체가 이 문제를 그만큼 다급하게 여겼음을 보여 준다.

    2)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지도자들이 염려한 것은 부활 자체가 아니라 부활의 조작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이들은 제자들이 밤에 시신을 훔쳐 갈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논리는 28장 13절에서 군병들에게 퍼뜨리게 한 소문과 같은 내용이다. 곧 부활을 부인하는 가장 오래된 반론이 이 단락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다.
    • 마태는 이 반론을 부활 이야기 바로 앞에 배치한다. 독자는 무덤이 봉인되고 지켜졌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빈 무덤을 만나게 된다. 이는 본문 구성에 근거한 이해이다.
    • 제자들은 이 순간 흩어져 숨어 있었고(26:56), 시신을 훔칠 용기도 계획도 없어 보였다. 지도자들의 염려와 제자들의 실제 상태가 대조된다. 이는 본문 흐름에서 확인되는 점이다.

    3)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백성에게 부활을 선포할 것을 예상한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표현은 초대 교회가 선포한 부활의 핵심 문구와 같다. 지도자들의 입에서 복음 선포의 내용이 미리 언급되는 셈이다.
    • 이들은 이 선포가 백성에게 미칠 영향력을 두려워한다. 십자가로 해결했다고 여겼던 문제가 부활 선포로 다시 커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4)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속임(플라네, πλάνη)'**은 63절의 **'속이던 자(플라노스)'**와 같은 어근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전의 속임'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후의 속임'은 부활 선포를 가리킨다. 지도자들의 관점에서 부활 주장이 더 큰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도 믿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하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 이 대목에서도 이어진다.

     

    27장 65절 말씀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27장 65절 해설

    1) "빌라도가 이르되"
    빌라도의 반응은 간결하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예수님의 재판 때 보여 준 고민이나 망설임은 이 장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그에게는 끝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본문은 그의 속마음을 밝히지 않는다.
    • 빌라도는 무덤을 지켜 달라는 요청에 직접 군대를 내주었다고 기록되지 않는다. 요청을 받아들이되 책임은 지도자들에게 맡기는 모습이다. 24절에서 손을 씻으며 **"너희가 당하라"**고 한 태도와 비슷한 결이 느껴진다.

    2)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경비병(쿠스토디아, κουστωδία)'은 라틴어에서 온 단어로, 경비대, 파수대를 뜻한다. 이 표현의 해석은 두 가지로 갈린다.

    • 로마 군인으로 보는 견해이다. 빌라도가 자신의 병력 일부를 내주었다는 이해이다. 이 경우 '너희에게'는 **"너희가 쓸 수 있도록 내가 주겠다"**는 뜻이 된다.
    • 성전 경비대로 보는 견해이다. 성전에는 레위인 중심의 경비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지도자들이 이미 거느리고 있던 병력을 쓰라는 뜻으로 읽는다. 이 경우 로마 군대가 아니라 유대 당국의 경비대가 된다.
    • 28장 11-15절에서 이 경비병들은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고, 총독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자신들이 설득하여 근심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을 듣는다. 이 내용은 성전 경비대 쪽 해석에 힘을 싣는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다만 어느 쪽도 확정적이지는 않다.

    3)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이 말에도 두 가지 이해가 있다.

    • '힘대로(호스 오이다테, ὡς οἴδατε)'는 직역하면 **"너희가 아는 대로"**에 가깝다. 곧 "너희가 할 줄 아는 방식으로"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개역개정의 '힘대로'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로 옮긴 것이다. 두 번역 모두 방법은 지도자들에게 맡긴다는 방향은 같다.
    • '굳게 지키라(아스팔리조)'는 64절의 **'굳게 지키게 하소서'**와 같은 동사로, 빌라도가 요청의 표현을 그대로 되받아 허락한다. 이 동사가 66절에서 한 번 더 쓰여 무덤 경비의 철저함이 강조된다.
    • 지도자들은 원하는 대로 허락을 받았다. 이 허락이 28장의 부활을 막는 안전장치가 되기는커녕, 빈 무덤의 증거를 더 분명히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본문 흐름에서 확인된다.

     

     

    27장 66절 말씀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27장 66절 해설

    1)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그들'은 62절에서 빌라도를 찾아갔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들은 직접 무덤까지 가서 일을 확인한다. 말로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을 직접 점검하는 철저함을 보여 준다.
    • 안식일에 무덤까지 가서 작업을 하는 모습은 율법의 정결과 안식에 민감하던 이들이 이 일 앞에서는 다급하게 움직였음을 보여 준다. 마태는 이를 직접 평가하지 않으므로 본문 흐름에서 읽히는 대비이다.
    • '경비병'은 65절에서 본 대로 로마 군인인지 성전 경비대인지 해석이 갈린다. 어느 쪽이든 이들은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무덤으로 향한다.
    • 61절에서 무덤 앞에 앉아 있던 여인들은 침묵 속에 머물렀고, 지도자들은 무장한 경비병과 함께 움직인다. 두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2) "돌을 인봉하고"
    '인봉하다(스프라기조, σφραγίζω)'는 봉인하다, 도장을 찍어 봉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 인봉은 보통 돌과 무덤 입구 사이에 끈이나 점토를 연결하고 인장을 찍어 누군가 열면 즉시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다만 마태는 구체적인 방법을 밝히지 않는다.
    • 다니엘 6장 17절에는 사자 굴 입구를 돌로 막고 왕이 인으로 봉한 장면이 있다. 마태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방식의 봉인을 떠올리게 한다. 
    • 이 봉인은 사람의 권위로 죽음을 가두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28장 2절에서 천사가 돌을 굴려 내는 장면이 이어지며, 사람의 봉인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력함이 드러난다. 이는 본문 흐름에서 확인된다.
    • 이 인봉은 무덤이 확실히 닫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후 시신 도난설(28:13)은 이 조치 앞에서 설득력이 약해진다.

    3)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굳게 지키니라(아스팔리조)'는 64, 65절에서 이미 두 번 쓰인 같은 동사로, 이 단락에서 세 번째로 반복된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 이 반복은 지도자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방비했는지를 강조한다. 요청(64절), 허락(65절), 실행(66절)이 같은 단어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 사람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무덤을 지켰다. 돌, 인장, 경비병이 모두 갖추어졌다. 그러나 이 철저함이 오히려 부활의 증거를 분명히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본문 흐름에서 확인되는 아이러니이다.
    • 27장은 **지도자들의 새벽 의논(27:1)**으로 시작하여 **무덤 경비(27:66)**로 끝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의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구조이다.

     

    마태복음 27장 마무리

    마태복음 27장은 새벽의 음모에서 시작하여 봉인된 무덤으로 끝나는, 수난의 가장 어두운 하루를 기록한다. 66절에 걸친 이 장면들을 따라오면 몇 가지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 넘겨짐의 연쇄와 인간의 책임
    유다에서 대제사장들로, 빌라도에게로, 다시 군병들의 손으로 이어진 **'넘겨줌'**의 끝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유다는 후회했으나 돌이키지 못했고, 지도자들은 시기로 움직였으며, 빌라도는 손을 씻었으나 책임을 지우지 못했다. 군중은 외쳤고 군병들은 조롱했다. 마태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몫을 가진 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2) 조롱 속에서 드러난 참된 왕
    홍포와 가시관, 갈대와 죄패, 그리고 "자기를 구원하라"는 외침까지 모든 조롱의 말이 역설적으로 진실을 증언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려오지 않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침묵과 순종의 길을 끝까지 걸으셨다.

     

    3) 하늘과 땅의 응답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부르짖음과 숨을 거두심 이후,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무덤이 열렸다. 사람들의 말이 멈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응답하셨고, 이방인 백부장의 입에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다.

     

    4) 끝까지 곁을 지킨 사람들
    제자들은 도망했으나 갈릴리에서 따라온 여인들은 멀리서라도 십자가를 지켜보았고, 아리마대 요셉은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두어 자기 새 무덤에 모셨다. 큰 일을 이루지 못해도 떠나지 않고 곁에 남는 신실함이 제자도의 본질임을 이들이 보여 준다.

     

    5) 닫힌 무덤, 그러나 끝이 아닌 이야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돌을 인봉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굳게 지켰다. 그러나 사람이 쌓은 모든 방비는 오히려 빈 무덤의 증거를 더 분명하게 만들 뿐이었다. 27장은 죽음의 정적 속에서 끝나지만, 이는 28장의 부활을 준비하는 마지막 침묵이다.

     

    마태복음 27장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는 빌라도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군중처럼 휩쓸리는가, 빌라도처럼 책임을 피하는가, 아니면 백부장처럼 십자가 앞에서 그분을 고백하는가.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극에 달한 자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이다. 그 사랑을 붙들고 빈 무덤의 소식이 기다리는 28장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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